그런 시
김익택
한 편의 에로틱 영화가 오감을 전율시키듯
한 곡의 음악에서 신명 신열을 느끼듯
한편의 소설에서 오금을 졸이듯
한 달 일년이 지나도록
큰 감동 감격 충격
가시지 않는
그런 시
한편
나
도
꼭
한
번
쓰
고
싶
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김익택
누군가 밤을 새며
심혈을 기울여 쓴
삶의 고뇌 결실 묶음들
좁은 골목 이곳 저곳
곰팡이를 뒤 집어 쓴 채
주인을 기다리는 그 눈빛 애섧다
사랑 지식 교양 철학 모두
반에 반 값
묶음과 묶음
책과 책 틈바구니에서
눈빛이 바쁜 사람들
헌책방 주인 묵은 먼지 털어내는
엷은 미소가 부드럽다
책을 팔러 나온 학생
책을 사러 나온 학생
절판 또는 시중에 없는
서적을 찾는 사람
또는 고서 수집가
지식의 혜안 올망졸망 반짝이는 눈빛
찾아오는 그들이 있어
보수동 헌책방 골목은 활기차다
시에 대한 짧은 단상
김익택
시가 짧다고 내용이 다 빈약한 것이 아니듯
시집이 가볍다고
그 안에 시들 다 가볍지 않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그러하듯
그리움이란
어떤 실체가 있어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없다
하지만
가슴에 새겨 두면
노래가 되고 눈물이 되고 추억이 된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그리움
마음의 눈으로 보는 추억들
거울 속의 내 얼굴처럼
눈, 코 귀, 입 근육의 떨림까지
나를 꾸짖어 이해하고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시를 생각하면
범접 할 수 없는 그리움이 있다
시간 속에 새벽이 있고 노을이 있고 어둠이 있듯
추억이 그리운 것이라면 추상은 불안과 설레임
삶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반대급부도 있다
내 안의 시를 묻다
김익택
날마다 먹는 삼시새끼
소화되고 곰삭아서 똥으로 나오는 것은
먹는 것에 삼분의 일 찌꺼기와 지독한 냄새 뿐인데
너는 내 안의 삶처럼
저렇게 지독하게 알뜰히 살았더냐
빨래를 쥐어짜듯 한약을 쥐어짜듯
남은 것은 버릴 수밖에 없는 오물
내 밖의 인생도 저처럼 치열하게 살았더냐
물방울이 바위를 뚫고
바람이 바위를 관통하고
정신이 물체를 움직이는
이데아를 언제 꽤 뚫어 보겠느냐
내가 읽은 시들을 맷돌에 갈아서
내 안에 위장이 굳은살이 돋도록
자근자근 씹고 씹어서 단물을 맛보았느냐
해체 상징 실험 관념 참여 서정
뿔뿔이 흩어진 글 속의 진실을
언제 꿰뚫어 보겠느냐
내 안의 술통 삭이고 삭여
발효된 글 하나 조탁해보겠느냐
내 안의 먹통 갈고 갈아
백지에 먹물이 학이 되고 군자 되는
의미를 언제 알겠느냐
죽음 전까지 사는 동안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고 읽고 느끼고
그래서 얻은 혜안 하나
바람 같은 시
한편 눈물 같은 시
소름 돋는 시 한편 언제 득하겠느냐
시 쓰는 마음
김익택
오늘도 나는 읽어 주는 사람 없는
시를 비망록 쓰듯
유언장을 쓰듯 절실하게 쓴다
잠 못 드는 밤
끝없이 들려오는 이명소리
틈바구니에서 어둠 속 적막의
서정의 꼬리를 붙잡고
염원 담아 나만의 원을 쓴다
고독 절망 그 뒤에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믿으며
추억과 기억을 더듬어
병신춤을 추듯 글을 쓴다
오는 내일은 또 다르다고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간곡하게 내일을 향한 시를 쓴다
한편의 시
김익택
누이고치에서 명주 뽑아
들실 날실 엮어서
한 필의 비단을 짜듯
내 맘을 엮은 한 편의 시
그런 시 한 편 얻고자
뇌수의 리듬 멈출 때까지
풀 먹인 무명 배를
다다미에 두드리듯
내 안의 나를 제 아무리
다듬어 보아도
시구는 내 몸같이 함께 살면서도
뜬금없이 먼데서 오는 귀한 손님
내 그릇이 작아서 일까
내 맘에 머무는 시간 언제나 찰나이다
백지 전투장
김익택
날마다 백지와 마주하는 일
하얀색 종이가 책임 압박을 한다
향기로운 꽃처럼
미각을 자극하는 음식처럼
들어도 또 듣고 싶은 노래처럼
사람 사는 냄새 물씬 풍기는
우리들의 얘기들을
통곡 같은 슬픔에는
카타르시스의 술잔을
즐거움에는 축배의 술잔을
읽는 사람 눈과 사로잡아
그 사람 입을 통해
다른 사람 가슴을 밝혀주는
귀감이 되는 글
하얀 백지에 정열을 쏟아 붓는 일
하얀 백지에 정신을 쏟아 붓는 일
하얀 백지에 고독을 털어 놓은 일
하얀 백지에 희망을 쏟아 붓는 일
나 혼자 감격하고 슬퍼하는 글이 아닌
읽는 독자가 감동하는 글
백지가 한번도 강요하는 일 없지만
쓰기를 마음을 세운 뒤부터
백지는 백병전투 장이다
시 공부하기
김익택
시를 쓴다는 것은 나를 복원하고
나의 삶을 복원하는 시간
내가 나에 대해서
궁금하면 궁금한 만큼
빈약하고 허약한 나
추운 사람에게
자주 가리는 구름처럼
지식과 지혜는 언제나 빈 깡통이다
나에게 시는 그 어떤 이유로도
끊을 수 없는 꿈이며 희망이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김익택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는 책임감을 느끼곤 한다
내가 이해는 잘 한 것일까
대뇌는 언제 얼마 동안 저장 되어있는지
언제 어떤 환경에서 인용될 것인지
느낀 감동은 언제까지 기억될 것이며
이 좋은 말을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인용될 것인지 미리 예측하고
습득하는 것 아니지만
읽고 터득한 많은 지식
기억하는 것보다 습관처럼
잊고 잃어버리기 일쑤
전문지식 공부 아니면 흐지부지 되는 마련
책장을 넘길 때마다 미안함은
감동을 느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시어 찾기는 그리움 찾기
김익택
시간의 언저리에서 맴돌지 말고
나에게 한번쯤 귀 뜀 해주면 안되겠니
오늘도 그저께도
우두망찰 서 있는 머리위로
떠도는 구름 한 점처럼
짧은 그늘만 드리우고 지나가지 말고
나에게 한번쯤 와락 안겨주면 안되겠니
너의 가슴 한쪽도 열수 없는 나는
정착하지 못한 바람
어디 한 곳 머물지 못하고
쓴 소주 한잔으로 마음을 달래는데
내가 너를 찾아 안착할 곳은
앞을 봐도 뒤를 돌아봐도 황량한 벌판이다
시야에 그려지는 모습 붙들고 얘기하는 사람
소원하나 들어주면 안되겠니
오늘도 나는 한 줄의 글을 쓰기 위해
김익택
오늘도 나는
내 생각 속에 잠든 언어들을
깨우기 위해
가정에서부터 나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와
취중진담 허풍 허세 혀끝에 떨어지는
보물 하나 주워서 구슬에 꿰 보려고
언어를 찾고 있다
그래서 얻은 언어
넋두리인지 잡문인지 모르는
문장 한 줄의 시라 생각하고
불시에 찾아오는 손님 맞이하듯
늦은 밤 홀로
하얀 모니터와 시름하고 있다
잠상
김익택
잠시 생각을 닫으면 행여 잊혀질까
머뭇머뭇 하는 사이 행여 달아날까
떠 오르는 생각 빈틈 주지 않으려고
떠오르는 잠상을 입으로 씹고 우물거려본다
좋아한다 말보다 사랑한다 말보다
그립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마음의 문 한쪽 열어 놓고
흐린 정신 집중하지만 찰나에 생각이 흐려지고
찰나에 감정이입이 흐트러진다
순간 잠상 잡으려는 것은 입에 넣은 뜨거운 감자
먹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잠상은 손가락 사이의 바람 빠져나가듯 사라져 버린다
잠상은 마음으로 듣고 마음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흐르고 마음으로 끊어지고
찰나에 떠오르고 찰나에 잊고 찰나에 잃는 것이라
더욱 소중한 것
잠상은 찰나에서 살고 죽고 잠상은 사랑해도 그리워도
시간과 공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인간의 정신 속에 살고
변치 않는 빈틈에서 마술처럼 산다
나를 위한 위로
김익택
도공이 제 도자기를 부수는 마음으로
잠 못 이루며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쓴 글을
미련 없이 버려야 하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이상이 응축되고 압축되기 위한 훈련의 과정
바람이 많이 불어야 더 높이 나는 연처럼
내속에 나를 일깨워 나를 찾는 길
나를 지키는 것은 자존심이 아니라 자긍심 때문이다
누가 내게 시를 왜 쓰느냐고 묻는다면
김익택
누가 나에게 왜
시를 쓰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나를 알기 위해
시를 쓰고
내가 나를 몰라서 시를 쓴다
보이지 않아도 무겁고
보이지 않아도 아프고
보이지 않아도 즐겁고
보이지 않아도 행복한
나의 맘의 위해서 쓴다
창작이란
김익택
쓰고 부정하고 재해석하고
내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나를 의심해서 나를 뛰어넘는 것
깊이 잠자고 있는
감성을 일깨우는 것도
바람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나를 발견하는 일
살아서 명품 되지 못해도
죽어서 명품 되는 포도주같이
내 안의 모난 혈기 죽이고
숙성시켜 밖으로 내보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