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휴정

김 익 택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는 옥수

자유롭게 흐르고

폭포를 거슬러는 바람 자유롭다

 

시간과 공간에 자유로운 건

생각만 아니다

 

만휴정 앞을 흘러가는

계곡 물은

옥수가 씻지 못하면 녹음으로 씻고

녹음이 씻지 못하면

바람으로 씻고 가라고

홀로 서 있는 만휴정이

가슴을 내놓고 있다

 

 

 

 

 

 

만휴정 감회

김 익 택

 

 

어지러운 세상 보기 싫어

낙향한 그분

옥수 흐르는 폭포수 굽어보면

무엇을 낚았을까

 

5백년 세월

무심히 흐르는 옥수는 말이 없고

만휴정은 온 몸 늙어

기둥도 마루도

비 바람에 뼈까지 하얗다

 

다만 현판의 글씨만

그분의 정신같이

천년 지나도 변치 않을 것같이

선명하다

 

 

 

만휴정의 시대정신

김 익 택

 

 

 

오래전 그분은

자연으로 돌아가도

그분의 분신같은 만휴정은

늙어 백골 되어서도

세대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앞 계곡 물 마르지 않으면

만휴정은 늙어도 청춘이듯이

 

앞으로 천년

정신 맑은 사람들에겐

삶의 시류를

아픈 사람들에겐

정신적인 위로를

한줌의 맑은 물

한줌의 맑은 공기가 될 것임을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독한 바람의 물음

김 익 택

 

 

더운 여름인데도 내 어깨에 시렸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바람의 존재 알림이었다

시간이 공짜가 아니면

세상 그 무엇도 공짜는 없다

고마움 알았을 땐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꽃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맺은 열매가 튼실한 것이 아니었다

바람이 조용히 그 결과를 물었다

더워도 시린 어깨 그 이유를

시간은 한결 같아도

재촉하는 삶이 있다는 것을

조용해도 꽉 차 있는 바람의 존재를

무시하고 살았다는 것을

무더위 속 바람은 묻고 있었다

 

 

 

 

만휴정 폭포

 

김 익 택

 

 

유월장마 주춤한 사이

내리 쬐는 태양

대지를 삼을 듯 푹푹 찐다

 

녹음에 덮인 오솔길 따라 걷다 보면

반갑게 맞이하는 폭포수 소리

가슴을 씻어준다

 

폭포 꼭대기 만휴정은

포란하는 한 마리 학 마냥

숲 속에 앉아 있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폭포수

용소로 곤두박질 치고 있다

 

세상의 시름소리 잠재우듯

시원한 소리에

나그네는

넋을 잃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만휴정 계류

김 익 택

 

 

 

갈래갈래 흐르는 물

음을 뜯는 가야금인가

층을 지어 흐르는 물

비단 짜는 배틀인가

참 곱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너럭바위 타고 흐르는

맑은 물

 

생각 따라 달라지는 모습

무식한 나그네를

잠시

도인을 만들고 시인을 만들고

노래를 만든다

 

 

 

 

만휴정 용소의 정중동

김 익 택

 

 

입에 개 거품을 물고

사정없이 떨어지는

용소 모습

인간사 군상을 보는 듯

하얗게 질린 포말들이

바둥바둥 대고

숨을 고른 초록물은

고생했다 괜찮다

만물의 생명은

소리없이 하늘로 올라가

내려올 땐 하늘에서

맨땅에 곤두박질 쳐

깨닫는 생명의 이치를

의젓해야 하고 품격을 갖추고

위엄도 있어야

저기 사람이 보고 있어

안정해

 

 

 

 

 

보백당과 만휴정을 세우게된 유래.

옛날 고란동에 민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과객이 묵어가기를 청했다. 민씨는 이를 쾌히 승낙했다. 그러나 하루만 묵겠다던 이 과객은 삼 년이 지나도록 떠나지 않았다. 어느 날 과객은 그동안 신세를 많이 졌다며 집터를 찾아주겠다고 청했다. 민씨는 마침 집터를 찾던 터라 과객과 함께 집터를 찾아다녔다. 어떤 곳에 이르자 과객은 걸음을 멈추었다. 민씨는 좋은 집터라 여기며 집을 지으려했다. 과객은 민씨를 말렸으나 그의 고집에 지고 길을 떠났다. 집을 짓는 것을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김씨의 집터에 민씨가 집을 집는다며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후에 집은 완성되었으나 민씨의 집안은 망하게 되었고 결국 김씨 문중의 하인이 보백당에 권유하여 그 집을 사서 들어가게 되었다. 이 후 김씨의 집안은 번성하고 부귀를 누리게 되었다

만휴정

만휴정 안에는 그 내력을 알 수 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쌍청헌(雙淸軒)이다.

쌍청헌은 원래 김계행의 장인인 남상치의 당호였다.

그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두 딸을 각각 김한철(金漢哲, 1430~1506)과 김계행에게 시집보냈다.

남상치는 부귀와 거리를 두고 청백의 정신을 지킨 인물로,

1453년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이곳 묵계로 낙향하여 쌍청헌을 짓고 은일적인 삶을 살았다.

김계행은 장인의 숨결이 서려 있는 옛터에

만휴정을 조성하여 그 정신을 이어갔던 것이다.

김계행은 성종 11년인 1480년 50세의 늦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태장을 당했으나 대사간에 임명됐고,

다음 해에는 옥사에 갇혔으나 대사성과 대사헌에 임명되는 등 부침을 겪었다.

결국 1500년 그의 나이 70세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묵계에 우거(寓居)했다.

김계행은 이듬해인 1501년 그의 나이 71세 때 만휴정을 지었다.

그는 폭포 위 계곡 가에 자신의 별서를 지어

세상과 절연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이른바 '장수지소((藏修之所)'를 경영했다.

그리하여 늦게 얻은 휴식, '만휴(晩休)'를 즐겼던 것이다.

그 뒤 25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만휴정은 거의 폐허가 되었는데,

1750년경에 보백당의 9세손인 묵은재(黙隱齋)

김영(金泳, 1702~1784)이 중수를 결심하게 된다.

김양근의 '만휴정중수기(晩休亭重修記)'를 보면

김영은 김계행이 지은 만휴정 옛터에

절벽을 깎아내는 등 매우 힘들게 공사를 시작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영은 기초 공사로 터만 닦아 놓은 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어 둘째 아들 김동도(金東道, 1734~1794)에게

만휴정 중수를 완성할 것을 당부하게 된다.

그리하여 김동도는 1790년 2월에 토대를 구축했고.

3월 22일에 기둥을 세웠고.

3월 30일 사시(巳時)에 상량식을 했으며,

5개월이 소요되어 마침내 만휴정을 다시 지었다.

김계행의 호는 보백당이다.

김계행은 68세 되던 1498년에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소산2리에 해당하는 설못(笥堤)에 살았다.

이때 집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당호를 '보백당寶白堂'이라 했다.

그는 일찍이 "우리 집엔 보물이라곤 없는데, 오직 청백만이 보물이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라고 읊었다.

'보백'은 거기서 취한 말이다.

반타석 바위에도 새겨져 있는 이 글은

만휴정에선 꼭 한 번 되새겨봐야 할 글귀다.

만휴정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이 글귀로 대신할 수 있다.

만휴정의 인문 정신은 바로 '청백'이다.

김계행의 자 또한 취사(取斯)인데 공자가 칭찬한 제자

복자천이 청백리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것과 연관되어 있다.

김계행은 81세 되던 해인

1511년 2월에 가족과 친척들이 다 모였을 때 자손들에게

"몸가짐은 삼가고 남에겐 정성을 다하라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愼 待人忠厚)"며 경계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는 임종 때에도 자손들에게 청백을 전했으며,

장례는 소박하게 치르고 미사여구를 써서 묘비를 짓지 못하도록 했다.

처음 만휴정이 지은 지도 5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만휴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변함없는 것처럼

김계행의 아름다운 정신문화도 그 세월 속에 녹아 있을 것이다.

만휴정은 보백당 김계행에게 유유자적한 만년의 휴식 공간이었다.

만휴정은 2011년 '안동 만휴정 원림'명승 제82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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