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서원에서
김 익 택
퇴계님 깊은 뜻
어찌 다 헤아릴까
상식으로 살고
양심으로 살려고 노력할 뿐
평생 공부해도 모자라는 학문인데
인 의 예 지는
수박 겉 핥기
하물며 사상과 철학을
어떻게
이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도산서원 나들이
김 익 택
사상과 철학을
가르치며 공부했던
도산서원은
그 분의 명성에 비해
미니어처같이 아담하고 정겹다
낡은 기둥에 걸린 족자
검은 대들보에 일필휘지
빼곡하게 쓰여진 종서 현판
한자여서 뜻 모르지만
그분의 숨결
집마다 방마다 베어 있을 것 같아
어느 하나 예사롭지 않는 것이 없다
어림짐작 그 너머
퇴계선생 행적을 닮고 싶음 맘에
유심히 들러 보는데
꼬리무는 관광객들이
주인 없는 집에 가득하다
도산서원 감회
김 익 택
하지를 향한 더위 30ºC를 넘나드는데
찾아오는 사람들
퇴계님께서 귀히 여겨서일까
앞강에서 불어오는 바람 시원하다 못해 달콤하다
평생 매화를 친구처럼 연인처럼 사랑하셨다는
퇴계님과는 달리 도산서원 앞 뜰에는
젊은 매화나무 몇 거루 매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
나그네 뇌리에 퇴계님과 매화가 겹쳐 흐르는데
길가 줄지어 선 모란 푸른 잎 고개 떨군 모습이
두향이 그리움인가 싶어
쉬이 눈을 뗄 수가 없다
도산서원 흔적 찾아서
김 익 택
퇴계님 학문 이해하지 못해도
정취라도 담고 싶어
흐르는 땀방울 손으로 훔치고
서원 샅샅이 카메라에 담는다
문명의 이기 자동차로 2시간반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올 수 있지만
그때는 그때 숙제를 남겨두고
오늘 할 일 최선을 다해야
미련이 없을 것 같아
눈이 놓친 숨결
가슴으로 찾을까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반복과 반복
김 익 택
바람이 남긴 말이 무엇이며
남긴 흔적 무엇일까
아는 이는 알고
모르는 이는 모르는
반복과 반복
부지런함이 전통이 되고
일등이 습관이 될 때까지
탄생과 죽음도
반복과 반복
의심과 믿음 희망과 절망
사랑과 후회
반복과 반복을 하며
나를 찾아간다는 것
겸손해야 이르는 길
김 익 택
고집은 참고
아집은 꺾고
나를 내려두고 돌아 설 줄 알아야
그 다음이 보이는 피안
모르면 더 깊이 듣고
아는 것은 한번 더 경청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는
내 안의 덕
내 의지는 언제까지나
든든한 숨은 후견
밖을 표출하는 분노는
최후의 항변이어야 한다
퇴계님 사상과 철학은
김 익 택
나라에서 님을 배우고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만든
천원 지폐
전면엔
님의 자상하고 근엄한 얼굴
후면엔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 같은 도산서원
시대의 흐름에
가치가 떨어지고 화폐가 바뀌어
사람들 기억에 멀어져 잊어져도
정신에서 정신으로
문화에서 문화로 역사에서 역사로
민족 가슴의 얼
그분의 사상철학
이기이원론은
세월에 흐름에 더욱 빛을 발하는
삶의 진리 기본이며 덕목이다
이퇴계님의 매화사랑
김 익 택
날마다 새로 맞는
새색시 같이
첫 사위 맞이 하는
백 년 손님같이
죽음을 무릅쓴 기도 끝에
딱 한번 본 관세음보살님같이
퇴계님은
평생
스승처럼 모시고
아내처럼 사랑하고
자식처럼 귀히 여겼다지요
퇴계님의 매화사랑
김 익 택
말해도 모르고
설명해도 이해 못하는
그분의 이기이원론 철학은
그렇다 하드라도
그분이 존경하고 사랑했던 매화를
나그네도 매화가 좋아
매화 시를 쓰고 매화를 사진에 담지만
향기가 좋아서 좋아하고
귀해서 좋아하고 예뻐서 좋아한다
그러나 존중은 하지만
사랑은 몰라도 존경까지는 아니다
학문이 모자라고 철학이 모자라
아마도 평생 짝사랑할지도
나그네 오늘 여기서
오래전 매화지고 푸른 열매 맺은
매화나무를 담으며
진지하게 설명하는 문화해설사 말에
모르면서 이해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존경과 공경 의미를 되새겨본다
말 속의 뼈
김 익 택
은근이 비꼬는 말
기분 상하지만
좋은 말 이어도
뼈 있는 한마디는 두고두고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남의 좋은 일에
은근한 질시는
나를 아프게 하는 일
자극으로 받아 들여야 내가 나를 이기는 일
비하해서
나쁘게 된다 해도
내가 시원해 지는 일 결코 아닙니다
칭찬은 아닐지라도
경청하는 그것 만으로
나를 경계하는 일
내 감정
직설적인 의사 표현은
내 스스로 나를 가볍게 하는 일입니다
내가 뱉은 말
실체 없어도
듣는 사람 귀에는
히드라 머리가 될 수 있음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찮고
귀찮고
치사하고
유취하고
아니꼽고
상대할 가치조차 없어도
꼭 말을 해야 하는 환경이라면
귀히 다듬은 다음
입 밖으로 내 보내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먼 길 떠나는 꿈을 꾼다
김 익 택
나는 언제나
먼 곳에서 꿈을 찾고
먼 곳에서 나를 발전시키려 한다
남이 쉬이 갈 수 없어
나만이 찾을 수 있는
나만의 개성 나만의 미지를
남보다 먼저 찾으려고
아프리카 세링게티 그 어디
아메리카 아마존 그 어느 곳
하늘 높고 땅 좁아 삶이 깊은 곳
사람과 자연 경계 없이
더불어 삶이 공존하고 꿈을 꾸는 곳
나는
매일매일 길 떠나는 꿈을 꾼다
과거는 미래의 행복 저축
김 익 택
오늘 즐거운 순간은
지나고 나면
불현듯 떠오르는 불청객 손님
언제 그랬던가
그런 일 있었던가
생각하지도 뜻밖의 선물이 되고
행복의 밑천이 된다
세월가면
아쉬운 것도 싫었던 것도
좋고 아름다운 기억 못지않는
추억이라는 선물 상자가 되는 것이지
전하지 못한 말
가까웠어도 먼 손님
잊었던 추억들은
그냥 있었던 하루의 삶 아니라
미래의 행복저축 이었음을
매화 피는 것은
김 익 택
좋아하는 맘이 지나치면
감정조절은 속수무책인가
눈비 오고 바람 불어처도
매화는 웃는다
이 악물고 살아도 어려운데
너는 무슨 책임 의무 있어
기어코 피고 마는 것은
마음의 중심이 의심 아니라
사랑이라는 걸
지키고 싶었음을 모르는 바 아님을
모두가 아는 바
매화는 그 약속 지키고 있음이라
퇴계님 사상은
김 익 택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
오백년 지나는 동안
천원 지폐 그림 도산서원
지금 모습이 짝퉁같이 보일지 몰라도
퇴계님이 확립한
이기이원론 사상은
민족의 철학에서 세계로 철학으로
삶의 도리
인의예지 사상은
종교와 철학을 론하지 않드라도
배우고 익혀 실천해야 할 인간의 덕목
배워야 깨우치고
실천해야 발전하는
민족의 지주 되어
오늘날 문화 선진국 발판이 되었음을
누가 부정할까
늙버들의 교훈
김 익 택
주고받는 험담
마음에 두지 않고
질투 음모 당해도
되갚지 않는다
그러나
앙심 없고 원한 없다 하여
결코 죽은 것 아니다
변화와 적응의 관계일 뿐
나 또한 너에게
어떻게 비쳐질지 모르는 일
네가 있어야 내가 있듯이
함께 있는 삶이다
늙버들 삶의 조용한 가르침
김 익 택
오백년 늙버들
구비구비 마디마디
희로애락 흔적
그동안의 삶
묻지 않고 말하지 않고 알아도
절로 느껴진다
삶과 사랑 고통과 인내
유리되지 않음을
눈과 마음 몸과 정신
하나되는 느낌이다
사군자 아니고
십장생 아니어도
존경은
삶과 사랑은 평등함
그것 또한
퇴계님의 사상
가르침은 아닐까
도산서원 늙버들
김 익 택
그 옛날 님 계실 때
아이 피부같이 보들보들 하지 않았으면
길게 땋은 부드러운 소녀
머리 같았을 버들은
몇 백 년 지나는 동안
아름드리 늙 버들이 되어
온몸은 푸른 이끼를 뒤 짚어 쓴 채
승천하지 못한 한마리 용처럼
꺾인 허리 지팡이 의지하며
읍을 하듯 도산서원 바라보고 있다
한국사람 우리는
김 익 택
힘든 일과를 끝내고
즐겁게 소주를 마시고
바쁜 일과를 끝내고
스포츠를 즐기는 직장인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여행을 가고 게임도 즐기는 학생들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고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
그게
애국정신이고
호국정신이고
위민정신이고
그게
홍익인간
제세이화
존중 배려 사랑
대한민국 뿌리 아닌가
도산서원
퇴계선생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곳,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
· 문화재 : 서원
· 분류 : 사적 제 170호 (1969. 5. 28)
· 시대 : 조선시대
·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산서원 배치도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생전에 강학(講學)하던 곳이며, 도산서원이라 함은 선생 사후 후학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지은 서원과 사당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서원의 배치 형태는 교육시설인 강당이 앞에 있고 제사 시설인 사당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로서, 후대의 많은 서원들이 이를 본받았다.특히 조선성리학의 본산이자 영남 유학의 구심점으로서 그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던 도산서원은 한국 서원의 종주로서 인정받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동재 - 박약재(博約齋)
박약재는 도산 서원의 원생이 기숙하던 곳으로, 동쪽 편에 위치한 까닭에 동재(東齋)로도 불린다. 강당과 함께 교육 공간의 중심을 이루는데 앞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서재(西齋)와 마주하고 있다. 동재에 거처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배가 된다.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건물로 정갈한 기단부와 기둥의 간결한 건축 구조는 서원의 품격을 잘 드러낸다.
* 박약(博約) - 학문을 넓게 배워 예로 행하라 (博學於文 約之以禮)
진도문 (進道門)
도산서당의 위쪽으로 서원을 건립하면서 도산 서당과 농운 정사의 사이에 진입로가 만들어졌다. 진도문은 이 진입 공간을 따라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아래쪽의 서당 영역과 서원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외부와 경계를 짓는 문으로 편액을 걸어 상징적인 예교(禮敎)의 의미를 갖게 하였다.
동광명실 (東光明室)
광명실은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는 오늘날의 도서관(藏書庫)인데 현판은 퇴계선생 친필이다. 진도문을 가운데 두고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樓閣式)으로 지었다. 1819년(순조19)에 세워진 동광명실에는 역대 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 선생이 친히 보시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하였다. 원래는 동광명실만 있었으며 서광명실은 근대 들어 증건(增建)하였다.
* 광명(光明)은 ‘만권서적(萬卷書籍) 혜아광명(惠我光明)', 즉 '수많은 책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 의미
옥진각 (玉振閣)
도산서원은 1969년부터 정부의 고적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옥진각은 퇴계선생의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완공되었다. ‘옥진’은 ‘集大成 金聲玉振’을 줄인 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다.’라는 의미이다.옥진각에는 퇴계 선생이 생전에 쓰던 베개와 자리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 매화 벼루, 옥서진, 서궤 등의 문방구에서는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선생의 손길이 느껴진다. 이외에도 청려장(靑藜杖), 매화등, 투호(投壺) 등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도 전시되어 있다.
하고직사 (下庫直舍)
도산서당과 기숙사, 서재, 부속시설을 관리하고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노비들이 거처했다. 지금의 건물은 1932년 옮겨지은 것으로, 원래는 6칸의 'ㄷ' 자 건물이었는데 이건(移建)하면서 동서 날개부가 1칸씩 증축되었다. 처음에는 서당과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서원 건립으로 진입로가 놓인 까닭에 농운정사와 함께 서당에서 분리된 모습이 되었다.
전사청 (典祀廳)
전사청은 사당에서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음식인 제수를 차리고 보관하는 곳으로, 음식의 재료를 날라오는 고직사와 사당 사이에 위치한다. 2칸으로 된 각각의 건물이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데, 동쪽을 주청으로 하고 서쪽에는 제기고를 마련해 두었다.주청(酒廳)은 온돌방 1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되었다. 온돌방은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유사가 하룻밤 지내는 공간이며, 마루는 제상을 마련하여 보관하는 장소이다.제기고(祭器庫)는 전사청의 서쪽 건물로 말뜻 그대로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곳이다. 문이 달린 마루칸과 전돌이 깔려 있는 봉당은 제수(祭需)와 제기를 옮기기 편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상덕사 (尙德祠)
도산서원의 묘우(廟宇)로서 퇴계선생과 그의 제자인 월천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보물 제 211호이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고 근엄한 맞배지붕으로 구성하는데 도산서원의 사당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전면 반칸은 퇴칸으로 개방하고 퇴칸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나머지 1칸 반은 전면에만 문을 달았다. 전면을 제외한 삼면은 벽으로 처리하고 내부는 하나의 통칸(通間)으로 하였다.월천은 선생 곁에서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고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서원에서 제자들을 훈육하였으며 특히 청렴 강직함이 돋보인 수재(秀才)이다. 주향위(主享位)는 정면 중앙에서 남향으로 '退陶 李先生'을 모시고 종향위(從享位)는 동쪽벽에서 서향으로 '月川 趙公'을 모시고 있다.
도산서당 (道山書堂)
도산서당은 선생이 몸소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57년에 착공하여 1561년에 완공하였다.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가 직접 기본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서당은 一자 형태의 단정한 3칸 건물로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다. 여기에 부엌 반 칸, 마루 1칸을 더 달아 내었고, 건물 3면에 퇴를 놓아낸 점이 특이하다. 덧지붕을 달고 마루를 연장하였으며,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이름 붙였다.사색과 연구를 계속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단칸방을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뜻은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이고, 제자를 가르치며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하는데,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깃들어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라는 겸손의 뜻을 담고 있다.
* 玩樂: 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 巖栖: 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
열정(冽井)
석정감열(石井甘冽), 네모지게 조성된 석조 우물이다. 『역경』의 ‘정괘(井卦)’, ‘정열한천식(井冽寒泉食)’의 우물의 의미를 취하여 '열정'이라 하였다. 도산서당 시절부터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물이 맑고 맛이 좋다. 선비들의 세심장(洗心場)과도 같다.‘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길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즐겨 길어 마시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주인 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듯 자신의 노력으로 인격과 지식을 쌓아, 누구나 즐겨 마실 수 있는 샘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 冽井 : 石井甘冽(돌로 된 샘물의 물은 달고 맑다)
전교당 (典敎堂)
서원의 강학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며 원장실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를 높여 위엄을 살렸고 양쪽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성리학자들이 기피하는 짝수 칸의 구성이 특이하며, 서쪽 1칸만 온돌방이어서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온돌방은 원장의 거실로 명칭은 한존재(閑存齋)이다. 대청 전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고 개방하였으나, 측면과 뒷면에는 각 칸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를 달았다.현재 모습은 1574년 처음 지은 것을 1969년 보수한 것이다. 전교당 정면의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1575년 선조로부터 사액(賜額)받은 것이다. 강당 벽면에는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정조의 사제문(賜祭文), 국기안(國忌案), 사물잠(四勿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보물 제 210호로 지정되었다.
서광명실 (西光明室)
1930년(庚午年)에 동광명실을 본 따 지었으며 이 역시 2층 구조의 누각 건물로 서원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문도를 비롯한 국내 유학자의 문집 등 근래에 발간된 각종 책들이 있다. 이곳에는 일본 유학자인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편찬한 '퇴계서초(退溪書抄)'가 있어 퇴계학이 일본 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광명실과 함께 모두 1,271종 4,917권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전국 서원 가운데에서 장서로는 고서와 진본이 유명하다. 보관된 각 종 문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농운정사 (隴雲精舍)
농운정사는 제자들의 기숙사로, 서당의 서쪽에 위치한다. 퇴계선생이 직접 기본 설계를 하고 당시 용수사(龍壽寺) 승려였던 법련(法蓮)과 정일(淨一)을 임명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공(工)자형의 대칭적 건물로 2개의 공간으로 나뉘는데, 각각 2칸의 온돌방과 앞으로 돌출한 마루 1칸,뒤쪽에 봉당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앞 기단 월대(月臺)에는 전돌을 깔았다. 이 기숙사는 2개 반을 수용했는데, 이 같은 연립식의 기숙사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도 남아 있다.
장판각 (藏板閣)
전교당 동편에 위치한 서원의 출판소로 목판(冊版)을 보관하는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벽체 사방을 모두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아 습기 방지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바닥도 지면에서 띄우고 전면 위쪽으로는 살창을 내어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퇴계의 문집, 유묵, 언행록, 도산십이곡, 선조어필, 병서(屛書) 등 2,790여장의 판각(板刻)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체계적인 분류와 안전한 관리를 위해 광명실 서책과 함께 2003년 4월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다.
상고직사 (上庫直舍)
서당 영역에서의 고직사와 구분하기 위해 서원의 고직사를 상고직사라고 한다. 상고직사는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노비들이 거처하던 곳인데 일반 살림집의 형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남북으로 긴 'ㅁ' 자형을 이루며 온돌방 7칸에 창고, 부엌 등을 합쳐 총 21칸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과 연결되어 있는 동쪽 통로와 하고직사로 연결되는 남쪽 통로 옆에 각각 부엌을 배치하여 생활에 편리함을 더하였다.
역락서재 (亦樂書齋)
도산서당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건물이다. 서원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담장이 둘러져 독립 된 공간으로 되어 있다. 서당의 제자들을 위한 기숙사로, 퇴계의 제자 정사성(鄭士誠)을 비롯한 뜻있는 제자들이 힘을 합쳐 세이퇴웠다. 온돌방의 서쪽 반 칸을 비워 아궁이를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정한 건물로 현판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 亦樂 :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서재 - 홍의재 (弘毅齋)
홍의재(弘毅齋)는 동재인 박약재와 마찬가지로 원생의 기숙소이다. 강당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위치하며,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재(西齋)라고도 한다. 동재에 기숙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배이지만 두 건물은 규모나 장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동재와 서재 모두 3칸 집으로 전면의 반 칸을 내어 쪽마루를 달았다.* 홍의(弘毅) -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 弘毅 任重而道遠)
삼문 (三門)
상덕사로 들어가는 사당문으로 내삼문(內三門)이라고도 불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삼문 형식으로 상덕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계단 때문에 문 안쪽과 높낮이의 차이가 생겨 전면 기둥을 1단 낮은 자리에 세웠다. 이러한 이유로 기단 아래까지 기둥이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역태극 문양에 단청을 하였다.
도산 연보
년 도 | 내 용 |
1501 (연산군 7년) |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진사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
1502 (연산군 8년) | 생후 일곱 달 만에 부친(贊成公)상을 당하다. |
1506 (중종 원년-6세) | 글 읽기 시작하다. |
1512 (중종 7년) | 숙부 송재공(松齋公)으로부터 <論語>를 배우다. |
1515 (중종 10년) | 숙부를 모시고 청량산에 가서 독서. |
1516 (중종 11년) | 봉정사에서 독서. |
1517 (중종 12년) 8월 | 경상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안동부를 순찰할 때 형과 함께 찾아가 강의를 듣다. 정신적 지주였던 숙부 별세. |
1520 (중종 15년-20세) | 침식을 잊고 열심히 주역을 탐독. 이 때 병을 얻어 평생 동안 고생함. |
1521 (중종 16년) | 부인 許氏(김해)를 맞아들이다. |
1523 (중종 18년) 6월 | 장자 준(寯)이 출생. 상경하여 태학(성균관)에서 수학. |
1527 (중종 22년) | 경상도 향시 진사시(進士初試) 장원, 생원시(生員初試) 2등 합격, 10월 차남 채(寀) 출생. 11월 부인 허씨 별세. |
1528 (중종 23년) | 진사시(進士會試-사마시) 2등으로 급제. |
1530 (중종 25년) | 부인 權氏(안동)를 맞아들이다. |
1532 (중종 27년) | 문과 초시 2등 합격. |
1534 (중종 29년-34세) 3월 |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다.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子)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 경연시독관 등의 요직을 겸임. |
1535 (중종 30년) | 호송관이 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호송. |
1536 (중종 31년) | 선무랑(宣務郞)과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9월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 |
1537 (중종 32년) | 모친(朴氏)상을 당하고 향리에서 3년간 복상. |
1542 (중종 37년-42세) |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으로 어사가 되어 충청도 감찰 재상어사(災傷御史)로 강원도 감찰. |
1543 (중종 38년) |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 여러 관직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
1544 (중종 39년) | 10월 상경 후 중종(中宗) 승하 후 고명을 지음. |
1546 (명종 원년-46세) 7월 | 부인 권씨 별세. |
1547 (명종 2년) 7월 | 안동부사로 제수(除授)되었으나 사임. 다시 홍문관 응교로 제수(除授)되어 마지못해 상경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 |
1548 (명종 3년-48세) |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10월 풍기군수로 전임(1년 2개월). 단양팔경은 퇴계 선생이 이때 선정한 것이다. |
1549 (명종 4년) |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청하여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되었음. |
1549 (명종 4년) 9월 | 9월,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향. |
1550 (명종 5년) 2월 | 계상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 |
1550 (명종 5년) 4월 | 광영당(光影塘-현재의 종택 자리) 조성. |
1553 (명종 8년-53세) 4월 |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사퇴. |
1553 (명종 8년-53세) 10월 | 추만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개정. |
1554 (명종 9년) |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씀. 중수경복궁기(重修景福宮記)를 지어 올림. |
1555 (명종 10년-55세) | 수많은 관직을 제수(除授) 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하였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하고 향리로 내려옴. |
1556 (명종 11년) |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가려 뽑아 <朱子書節要>를 편차. |
1556 (명종 11년) 12월 | ‘향약(鄕約)’을 초. <주자서절요>의 서문을 짓다. |
1557 (명종 12년-57세) | 도산서당 터를 마련. |
1557 (명종 12년-57세) 7월 | <계몽전의(啓蒙傳疑)> 저술. |
1558 (명종 13년-58세) | 23세의 율곡 이이(李珥)가 계상서당을 찾아와 도학을 논함. |
1559 (명종 14년) | <송계원명리학통록(理學通錄)>을 편찬함. |
1560 (명종 15년-60세) |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 답하는 편지 형식으로 철학적 대명제인 4단7정론(四端七情論)을 논변함. |
1561 (명종 16년) 3월 | 절우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경치를 돌아보고 도산기(陶山記) 등 명문을 남김. 도산서당, 농운정사 완공. |
1564 (명종 19년) 4월 | 제자들과 청량산을 돌아봄.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음. |
1566 (명종 21년) |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음. |
1566 (명종 21년) 10월 | 이언적(李彦迪) 선생 행장(行狀)을 지음. |
1567 (명종 22년) | 임금의 교지를 받고 상경. 명종이 승하하자 대행왕(大行王)의 행장(行狀)을 지음. |
1568 (선조 원년) | 의정부 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除授)되자 6월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양관 대제학을 겸임함.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왕에게 올림. 12월 제왕학인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리자 왕은 정원(政院)에 병풍과 장첩을 만들 것을 명함. |
1570 (선조 3년-70세) | 제자들에게 심경과 <역하계몽>을 강의. 고봉 기대승과 심경정도(心經情圖)를 의논하고, 11월 그의 격물치지설(致知格物說)을 개정함. 12월 장사준비를 갖추게 하여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과 자명까지 몸소 써놓고, 8일 한서암에서 70세를 일기로 역책. 영의정으로 추증(追贈)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領經筵弘文館藝文 館春秋館觀象監事 追贈. |
1572 (선조 5년) |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에 위패 봉안 결정 |
1573 (선조 6년) 11월 |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 |
1574 (선조 7년) |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짓고 서원 설립 |
1575 (선조 8년) | 서원 낙성,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사액됨 |
1576 (선조 9년) | 도산서원 완공, 위패 봉안. 여강서원(廬江書院) 위패 봉안. |
1576 (선조 9년) 12월 | 시호 문순공(文純公) |
이황(李滉, 1501~157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뛰어난 학자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이다.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으나, 현부인이었던 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아버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論語)』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18세에 지은 「야당(野塘)」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周易)』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그 뒤부터 평생을 병치레하였다 한다.
27세에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구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해 귀향 도중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37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 간 복상했고, 39세에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받았다. 중종 말년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히고,
43세이던 10월에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가 되던 해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兎溪)의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退溪)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았다. 끝내 퇴거(退居)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자, 퇴계는 이를 피해 전임을 청해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풍기군수 재임 중 주자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전임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安珦)이 공부하던 땅에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서적(書籍)·학전(學田)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56세에 홍문관부제학, 58세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43세 이후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60세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 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禮)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어진 이를 초빙했으나 오지 않음을 탄식하다)」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좌우에 두었다고 한다. 그 뒤 친정(親政)하게 되자, 퇴계를 자헌대부(資憲大夫)·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顯職)에 임명,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제(新帝)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퇴계의 내경(來京)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퇴계의 성망(聲望)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한 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정이(程蓬)의 「사잠(四箴)」, 『논어집주』, 『주역』,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등의 깊은 의미를 진강하였다.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서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 어린 국왕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還故鄕)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 학문 탐구에 전심하였으나,
70세가 되던 다음해 11월 병환이 악화되었다. 돌아가시던 날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愁: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유계(遺誡)대로 소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 죽은 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퇴계선생과 매화시
이동구
퇴계선생의 생애
1501년(연산군 7년) 11월 25일 도산면 온혜리 노송정(老松亭)에서 출생하셨고, 출생 후 7개월 때 부친께서 별세하여 모친(母親) 춘천박씨께서 농사와 누에치기로 가계를 운영하셨다.
모친 박씨는 자녀에게 “문예에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과 행실을 더욱 조심하고, 과부자식이라고 업신여기지 않도록 남보다 백 배 더 힘 쓰라”고 훈계하시었고 “비록 문자는 익히지 않았어도 그 의리를 가르쳐주고 식견과 사려는 군자와 같았다”고 퇴계선조께서 모부인의 묘비명에 회고하셨음을 미루어보면 학문과 인격형성에 모부인의 영향이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6세 때 이웃노인에게 천자문(千字文)을 배우기 시작하여 12세부터 숙부(叔父) 송재공(松齋公)께 논어(論語)를 배우고 유학공부에 전념하여 20세에 무리한 공부로 속병을 얻어 평생 고생을 고생하셨다.
21세에 허씨부인과 결혼하고 23세에 성균관에 유학하여 27세부터 각종과거에 응시하시다가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가신다.
이후 10년간 벼슬길이 순탄하여 성균관사성(종3품)이르러 야인생활의 뜻을 품고 52세까지 3차례나 소환 당하시며 야인생활로 접어드는 과도기를 맞이하신다. 이시기의 주목되는 사건으로 ① 43세 사헌부 장령을 병환으로 사임하셨으나 계속 승차하여도 병환으로 부임하시지 못하기도 하였음에도 성균관 사성이 되고 말미를 얻어 귀향하여 예빈시 부정에 제수되셨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이때 남명 조식에게 벼슬길에 나간 것을 후회하시고 고향에서 공부에 열중할 뜻이 있다는 편지를 보내셨다.② 46세때 퇴계 동암에 학문의 처소로 할 암자인 양진암을 짓으셨음.③ 48,49세때 스스로 외직을 구하여 단양과 풍기군수 역임. ④ 군수를 세 번 사직하여도 수락되지 않아 무단귀향으로 임소이탈의 죄목으로 직첩박탈(50세). ⑤ 27세때 허씨부인 별세와 30세에 재혼 권씨부인이 46세때 별세, 48세떄 둘째 아들(寀)까지 잃음.⑥ 50세 때 형 온계공 사화의 격동 속에 간신배의 모함으로 장류되다가 도중에서 별세 등이 있었다.
52세때 홍문관교리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에 거셔서 성균관 대사성까지 오르셨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퇴하여 이후부터 반복되는 임명과 사직으로 형식적으로는 70세(판중추부사)의 연세로 별세하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끊임없이 은퇴하려는 본인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퇴계선조의 노년기이다.
학문적 업적은 청장년기의 저술은 별로 없고 50대에 성균관 대사성을 사직하고 연구업적이 시작된다. 개정천명도(53세)부터 답기명언서개치지격물설(70세)까지 22편과 기타의 저술을 내 놓으셨다. 2번째 귀향하여 한서암을 지으실때(50세)부터 따르는 선비가 많을 뿐 아니라 공부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치 않아 상계, 죽동, 하동 등지를 옮기시다가 도산서당을 지으시고(60세) 이곳을 중심으로 스스로 학문을 키우는 동시에 후진을 인도하심이 별세하시기 전날까지 계속하시었다.
별세하시기 4일전(1570년12월4일) 조카[甯]에게 유계(遺誡)를 쓰게 하시니 “첫째 예장(禮葬)을 사양하고, 둘째 비(碑)는 세우지 말고 작은 돌에다 전면에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하고 후면에는 간략하게 향리(鄕里)와 세계(世系)와 지행(志行)과 출처(出處)를 진술하기를 가례(家禮)중에 있는 바와 같이 하라.”고 하셨고, 별세하시던 날(1570년 12월 8일) 아침에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하시고 유시(酉時)에 “자리를 바르게 하라”고 하시고 부축되어 일어나 앉아 엄연(儼然)히 돌아가시었다.
퇴계선생 시(詩)에 대하여
공자 맹자를 비롯된 유학자의 문학관은 단순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한 문예작품이 아니라 도리와 문학의 일치[道文一致]를 근본으로 삼는 경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많은 유학자들은 시를 통하여 도리를 밝히는[以詩明道] 전통을 이으면서 시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사상 그리고 윤리를 밝히려 하였다. 그러므로 도리가 실려있지 않은 시는 적어도 유학자의 경우에는 시로서 그 품격이 떨어졌다.
퇴계선생의 경우에도 『하늘과 사람이 하나라는 사상[天人合一 思想]』을 보여준 시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퇴계학을 연구하는 일본학자 高橋進은 「퇴계는 초월자인 신과 같은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인간의 생사는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있다. 즉 각자 자기의 생사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자기의 운명은 자기의 마음과 성정(性情)에 좌우될 뿐이다. 이것이 퇴계학의 독특한 면이다」고 한바 있다.
이와같은 철학적 사상을 많은 저술에서 밝히셨지만 이를 근본으로 시를 지으시고 실천의 의지를 다짐하셨다는 것이다.
선생 시를 연구하는 중국학자 왕소(王甦)는 선생께서 시에 관하여 읽지 않은 것이 없는 듯하여 지극히 광범위하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나 「주로 도연명의 감정, 두보의 품격과 규칙, 소동파의 아름다운 말씨, 주자의 사상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사람의 감정이란 사랑하는 것[愛之者]이 좋아하는 것[好之者]만 못하고 좋아함이 즐겨하는 것[樂之者]만 같지 못하다. 도연명. 두보. 소동파에 대한 태도는 좋아하고 사랑할 뿐이지만 주자에 대하여는 사랑할 뿐 아니라 좋아하고 즐겨하기에 조금도 권태로움이 없이 평생 한결같으셨다」고 한다.
한시(漢詩)는 일반적으로 작품의 문맥이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작품외적 사실에 깊이 그리고 은미(隱微)하게 연계되어 있는 일이 많다, 퇴계선생의 시가 특히 그러하다고 한다. 그래서 선생께서 스스로 「처음 읽으면 비록 냉담한 것 같지마는 오래 두고 읽어보면 의미가 없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하며, 문맥 밖의 문맥은 주로 현실의 인간관계와 도학의 논리가 된다고 한다.
퇴계선생의 시에서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意想]은 많으나 그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선계(仙界), 달빛, 매화가 있다. 이 들의 공통점은 “깨끗하고 고요함[淸淨] 또는 맑고 참됨[淸眞]이다” 선계는 깨끗한 공간, 달빛은 고요한 분위기, 매화는 맑은 빛이다. 이 들이 둘 또는 셋이서 서로 얽혀 나타나면서 깨끗하고 고요하고 참된 세계를 바라면서 찾고 즐기는 것이 선조의 도학시의 세계이다. 이것이 곧 주리론(主理論)의 시적(詩的) 대응이라고 한다.
퇴계선생께서 남기신 시가 증보퇴계전서(내집 5권, 별집 1권, 외집 1권, 속집 2권)에 2,013수가 수록되어 있다고 하고(왕소 중국담강대 교수), 또 1,200여제에 2,270수가 전한다. 고도 하고, 내용은 잃어버리고 제목만 전하는 것이 800여제나 된다. 고 하고 있다(이동환 고려대 교수). 수량으로 본다면 중국의 시성 두보의 1,405편보다 많다. 다만 두보는 장편이 많고, 퇴계선조는 절구가 많아 편폭은 두보에 비하여 적다 할 것이다. 사상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주자보다는 배 가까이 많다고 한다.
15세부터[石蟹 : 가제] 70세의 돌아가실 때[而得寓精舍四絶見投今和其三 : 11월에 유응현의 시에 화답한시 임] 까지 시를 지으셨으며, 시를 본격적으로 지으시기는 33세(계사, 1533년)부터인데 37세(정유, 1537년)부터 39세(기해, 1539년)까지 3년간은 한 수도 짓지 않으셨다. 이때는 모부인 박씨의 상을 당하여 상중에 있어 슬픔이 스미어 시를 지으실 수 없었을 것이다. 또 163수나 지어 일생 중 가장 많은 시를 지으신 해는 61세(신유, 1561년) 때에 이다. 이 해에는 말에서 떨어져 신병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시며 도산서당 앞에 절우사를 꾸미신 해로서 마음이 가장 안정되신 해였다고 한다.
매화시에 대하여
퇴계선생께서는 자신이 지으신 매화시 91수를 모아 《梅花詩帖 : 매화시첩》이라는 독립된 시집(詩集)을 유묵으로 남기셨다(상계종택 소장 ; 오래동안 영인출판되었음) 매화시는 모두 75제 107수(시첩 62제 91수)로 단일 소재로는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매화는 세속의 티끌 한 점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과 더러운 풍속에 굴하지 않는 절개와 봄날 같은 희망을 상징하는 꽃으로 많은 문인들이 달과 함께 맑고 깨끗한 시로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로 인식되어 왔다. 또 매화를 좋아하는 이유로 혹독한 겨울을 이기고 제일 먼저 꽃망울 틔워 봄이 왔음을 알리는 우주의 기별자로서 사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께서는 겨울을 이겼다. 라는 경직된 절의(節義)만으로 매화를 대하지는 아니하셨다. 우주를 유연하게 깊은 안목으로 절의를 해석하여 고상한 인격체의 표상으로 대하셨다.
특히 절우(節友 ; 梅 蘭 松 竹 菊) 중에도 유독 매화를 매우 사랑하시었다. 매화로서 적막함을 달래셨고, 매화를 찾는 것을 신선과 봄과 같이 여기시었으며, 돈독하게 좋아하는 정은 가까운 벗과 같이 친하시었고, 사모하는 마음이 일일이 여삼추 같았으며, 어느 때고 관심이 식은 적이 없고, 조급할 때나 위태로울 때에도 매화를 잊지 않으시었으며, 매화를 읊음은 심사를 의탁하시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매화분을 딴 곳으로 옮기라 하시고「매형에게 불결하면 내 마음이 미안해서 그렇다(於梅兄不潔 心自未安耳)」하셨으니 본인의 추한 모습으로 인하여 매화도 추해질 것을 걱정하시었고, 운명 직전에 주위사람들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라고 하시었으니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까지 매화를 잊지 못하시었다.
선생께서 42세(임인, 1542년)때부터[玉堂憶梅] 70세(경오, 1570) 봄까지[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喜題一絶云] 매화를 주제로 시를 지으셨으나 대부분이 중년 이후에 지으신 것으로 노년에 들어 도학이 무르익을수록 매화시를 많이 지으셨으니 매화시와 도학적 정신세계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많은 매화시에서 매화를 실로 여러 면으로 묘사하셨다. 그러나 그 여러 면의 많은 부분을 아우르는 것은 크게 보아 『깨끗하고 맑음[淸淨] 또는 깨끗하고 참됨[淸眞]』이라고 한다.
선생께서 68세(1568년) 7월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 상경하시어 69세(1569년) 정월28일에 도산의 매화를 그리워하시며 만나지 못하는 아쉬움을
憶陶山梅 도산 매화를 생각하다
湖上山堂幾樹梅 호숫가 도산서당 몇 그루 매화꽃이
逢春延停主人來 봄철을 맞이하여 주인 오길 기다리네.
去年已負黃花節 지난 해 국화시절 그대를 버렸으나
那忍佳期又負回 아름다운 그 기약 어찌 또 버릴까
丙歲如逢海上仙 병인년이 되어서는 바다 신선 만난 듯
丁年迎我似登天 정묘년은 나를 맞아 하늘에 오르는 듯
何心久被京塵染 무슨 마음 오랫동안 풍진에 물들어
不向梅君續斷絃 매화와 끊긴 인연 다시 잇지 못하는고.
* 병인년(1566.명종21)1월26일에 왕명으로 상경 중 득병으로 3월15일에 귀향
* 정묘년(1567.선조원년)6월14일에 왕명으로 상경하여 8월10일에 낙향 하셨고,
3월 2일에 낙향윤허의 언질을 받으시고 3월 3일에 玩賞하시던 盆梅와 이별의 아쉬움을
漢城寓舍盆梅贈答 서울 집에서 분매와 주고받다.
頓荷梅仙伴我凉 매선이 정겹게도 외로운 이 몸 벗해주니
客窓蕭灑夢魂香 객창은 쓸쓸해도 꿈속은 향기로 왔네.
東歸限未攜君去 그대와 함께 못 가는 귀향길이 한이 되나
京洛塵中好艶藏 서울의 먼지 속에서도 고운 자태 지녀주오.
盆梅答 매화가 답을 하다
聞說陶仙我輩凉 듣자하니 도선도 우리 마냥 외롭다니
待公歸去發天香 임께서 오시기를 기다려 좋은 향기 피우리니
願公相對相思處 바라오니 임이여 마주 앉아 즐길 때
玉雪淸眞共善藏 옥설과 같이 맑고 참됨을 함께 고이 간직해 주오.
* 東歸 : 竹嶺을 넘는 길, 西歸 ; 鳥嶺을 넘는 길
* 陶仙 : 도산에 있는 신선, 즉 도산에 있는 매화
라고, 주고받으시고 3월 5일에 서울을 떠나 3월 17일에 도산에 도착하시어 도산의 매화와
季春至陶山 山梅贈答 늦봄에 도산에 이르러 매화와 주고받다
寵榮聲利豈君宜 부귀와 명리는 어찌 그대와 어울리랴
白首趨塵隔歲思 풍진 좇은 지난 삶에 백발이 다 되었네
此日幸蒙天許退 지금은 다행히도 낙향 윤허 받았으니
況來當我發春時 하물며 오심이 내가 활짝 꽃 필 때였던가.
主答 주인이 답하다
非緣和鼎得君宜 和鼎이 탐이 나서 그대 사랑함 아니라
酷愛淸芬自詠思 맑은 향기 좋다보니 사모하여 절로 읊네
今我已能來赴約 나 이제 기약대로 그대 앞에 왔으니
不應嫌我負明時 꽃 핀 시절 놓칠망정 허물은 말아주오
* 和鼎 : 옛날에 매실을 쪄서 조미료로 사용하는 것
라고 반가움을 나누시고, 4월 2일에 서울에 남겨 둔 매분에 대한 그리움을
次韻奇明彦 追和盆梅詩 見寄 기명언이 화답해 온 분매시를 차운하여 보내다
任他饕虐雪兼風 그대를 모진 눈바람 속에 맡겨두고
窓裏淸孤不接鋒 나는 창가에서 淸孤히 탈 없이 지났다네.
歸臥故山思不歇 고향산천 돌아와도 그대 걱정 그치지 않으니
仙眞可惜在塵中 仙眞한 그 모습이 티끌 속에 있음이 애처롭네.
* 奇明彦 : 奇大升(1527~1572, 號 高峯)
라고 읊으시고, 70세(1570년) 3월 27일에 손자 안도와 함께 찾아온 서울의 분매를 맞이하여
都下梅盆好事金而精付安道孫兒船載寄來喜題一絶云
서울에 있는 분매를 호사자 김이정이 손자 안도에게 부탁하여 배에 싣고 보내오니
기뻐서 이를 시제로 삼아 한 절을 읊다.
脫却紅塵一萬重 먼지를 뒤로하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來從物外伴癯翁 속세밖에 찾아와 여윈 늙은이와 짝을 하네.
不緣好事君思我 안달하는 그대가 이 몸 생각 없었다면
那見年年冰雪容 빙설같은 그 얼굴 해마다 어찌 볼까.
* 金而精 : 金就礪(1526~?, 號 潛齋)
* 安道 : 李安道(1541~1583, 號 蒙齋, 퇴계 맏손자)
라고 다시 만나는 기쁨으로 읊으신 것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시기 전(1570.12.4.)에 본인의 불결한 모습을 매화분재에게 보이기를 싫어 다른 방으로 옮기라고 하시고, 돌아가시기 직전(1570.12.8.아침)에 “매화분재에 물을 주라”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셨다,
소설가 최인호(소설 유림 6권239쪽)는 “생전에 그토록 상사하던 매분이었으므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게 물을 주라는 퇴계의 유언은 이 세상에 모든 삼라만상이 너와 나의 대립관계가 아니라 둘이 아닌 하나라는 상생의 철학을 의미하고 있는 심오한 최후의설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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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絲淳 譯註 退溪選集. <退溪의 生涯와 思想>. 서울 玄岩社. 1993
王甦 著, 李章佑 譯. 退溪詩學(改譯版). 대구 中文出版社.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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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도산서원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