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읍성에서 성찰

김 익 택

 

 

이끼 낀 돌 하나하나

옮기고 다듬으며

아픈 사연 얼마이며

쌓고 다지면서 흘린

피와 땀 또 얼마일까

 

옛날 그분들 아픔과 거룩한 희생

어림짐작밖에 몰라도

저 차곡차곡 쌓은

돌 하나 흙 한줌은 그분들의 영혼

 

성벽에 달라붙은 각기 다른 이끼같이

비 바람의 흔적 어디 그것 뿐일까

보는 사람 따라 달라지는 느낌같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켜 온 칠백년은

 

전쟁 없는 평화가 소원

스치는 바람 눈에 보이는 풍경

그것 모두

옛날 그분들 소망 일부분 아닐까

 

 

청도 읍성길을 걸으며

 

김 익 택

 

 

 

꾸불꾸불한 성길 따라 펼쳐진 푸른 잔디

그 위로

노인을 모시고 나온 나들이 가족

아이들이 뛰어놀고

연인들이 데이트 즐기고 있다

 

그 옛날 청도성은

나라를 위해 활과 검을 들고

죽어도 지켜야하는 군사 방벽

 

옛 그분들의 고귀한 죽음의 바람

유지와 원 전쟁 없는 나라

그 꿈이 이루어져 지금은 누구나 자유로운

경계심 없는 자유공원

 

아무리 마셔도 모자람 없는 싱거러운 맑은 공기

아무리 봐도 싫증나지 않는 꽃과 초록빛

옛날 그분들의 나라사랑 영혼 아닐까

 

청도 읍성 석빙고

 

김 익 택

 

 

 

 

 

그 옛날 삼복 더위

삼계탕 보다 더 귀한

얼음 한 조각

보물창고 석빙고

차가워서 사랑받고

차가워서 동경이 되었지요

춥고 긴 겨울

삶의 아픔의 증표 얼음이

더워서 몸서리치는 여름

약이 될 수 있음을

저 석빙고 빈 가슴은

알고 있었을까

 

석빙고가 양심을 묻다

 

김 익 택

 

 

 

 

 

청도읍성 석빙고는 거대한 공룡 화석같이

내장은 비어 있고 앙상한 갈비뼈같은

지붕만 남아있다

여기서 낙동강은 몇 십리이며

여기까지 무엇으로 어떻게 운반했을까

그 시절 양민은 얼마나 고생했을까

일일이 지게에 지거나 소달굴지로 운반했을텐데

그들은 더운 여름 얼음 한 조각 맛이나 봤을까

이 석빙고를 쌓기 위해

이 큰 돌은 어디서 어떻게 운반했을까

눈에 그려지는 어림짐작에 내가 미안하다

녹아서 삶이 되고 녹아서 흔적 없는

그들의 영혼같이 텅 빈 석빙고의

아름드리 쌓은 돌담과 지붕을 떠받친 거대한 돌을

바라보는 내 가슴에 바위를 얹어 놓은 양 답답하다

 

 

 

 

청도 읍성 축제

 

김 익 택

 

 

 

 

 

상모 돌리며 춤추고

꽹과리에 장단 맞춰 북치며 장구치고

징울리며 소고치고

아리랑 쓰리랑 노래 부르며

 

청도읍성 성 밟기는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늘과 조상님께 감사하는 축제

 

바람 불면 고맙다는 인사이고

비 오면 한 해 농사 축복

 

마음과 마음이 한데 모여

영혼을 위로하는

농악 소리가 잠든 성을 일깨운다

 

 

 

 

 

 

 

 

◆ 청도 읍성(淸道邑城) ◆

지정번호 : 경상북도기념물 제103호

지 정 일 : 1995. 1. 14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동상리,동천리

시 대 : 고려시대

소 유 자 : 국유,사유

이 읍성은 청도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북저의 석축성(石築城)으로 고려 때부터 있었다.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읍성의 평면형태는 방형이고 성벽은 자연석 협축벽이며 북·동·서벽의 중앙에 성문이 구비되어 있었다. 규모는 화안문헌고(華按文獻考)에 둘레 1,570보(약1,800m)에 벽고는 5자 5촌(약1.65m) 여첩은 600측이라 하였다.

당시의 성곽은 석성과 토성을 혼합해서 쌓은 것으로 화양읍 서상리, 동상리, 교촌리를 둘러싸고 있던 것을 군수 김은휘(金殷輝)에 의해 1590년(선조23) 착수하여 1592년(선조25)까지 석축형으로 고치고 성의 높이도 더 높이게 되었는데,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동·서·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다. 그 후 성벽의 수축(修築)과 문루(門樓)의 재건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의 읍성 철거정책(邑城 撤去政策)으로 다시 성벽이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또한 장관청, 아전청, 회계소, 동헌(東軒), 객사(客舍), 군기고(軍器庫) 및 3개의 누각 등이 성 내부에 있었으나 지금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철거되었다. 그러나 지방관아와 민가가 한 울타리 안에서 살았고, 성곽 기저(基底)부분이 잘 남아있으며 기록도 전해지고 있는 청도읍성은 지방관아 및 읍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유적이다.

◆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

지정번호 : 보물 제323호

지 정 일 : 1963. 1. 21

소 재 지 :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교길 7

시 대 : 조선시대

소 유 자 : 국유

이 빙고는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으로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 .여름 .가을까지 사용하였다. 청도읍성 동문 동상리 구릉에 위치하고 크기가 길이 14.75m, 넓이 5m 높이 4.4m로 화강암을 지하에서 아치모양으로 틀어 올려 쌓아 올리고 다듬은 돌로 홍예를 올린 후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석빙고의 입구는 서쪽에 있으며 입구의 출입문은 지금은 없어 졌고 계단을 따라 안으로 내려가게 되어있다. 바닥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경사가 졌으며, 흙을 단단하게 다진 바닥에 돌을 깔았다. 배수는 양쪽 가장자리에 있는 배수로의 경사를 따라 가운데 배수구에 모여 외부로 흘러나가게 되어 있다.

천정은 아치형으로 된 10개의 돌을 짜서 틀어 올려 4개의 보를 만들었다. 이 보위에다 거대한 판석을 덮어 천정을 만들었는데, 이들 개석(蓋石)은 거의 파괴 또는 없어지고 몇 개만이 앙상하게 남아있으며, 환기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청도 석빙고는 조선 숙종39년(1713년) 2월 11일에 진사 박상고(進士 朴尙古)가 착공하여 같은 해 5월 5일에 준공했다. 빙고 비문에는 『전면 : 始於二月十一日至五月五日而訖盖役衆五千四百五十一皆一日赴役成石梯六百七役二十日石工十三治匠三木手一粮米五三石瓦功錢三百兩正鐵一千四百三十八斤口三 百八十四石』『후면 : 癸巳五月初六日立 左監 衝黃亦鳳 進士 朴尙古 左色貢生 崔世哲 幼學 李義孝 都色貢生 朴以載 庫直 金千世 幼學 左色貢生 朴徽碩 右 李胃善 治 朴世 右 判官 金汝俊』로 기록되어 있어 축조당시 석공이 13명, 목수와 치공 등 연인원 6천74명 정철 1,438근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고장의 빙고는 신라초기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 오산지(鰲山誌)에는 당초 청도읍성 북문밖에 있었는데, 토굴로 만들어 협소하고 허물어져 이곳에 다시 축조하였다고 하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신라 지증왕 때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전국에 보존되고 있는 6기의 석빙고 중 가장 오래된 석빙고이며, 규모도 제일 큰 소중한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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