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서원
김 익 택
바람이 앗아 갔는가
세월이 거둬 갔는가
땅 넓은 곳에 대궐이 어리어리한데
안내판은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솟을 대문 숭유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어
들어갈 빈틈이 없다
나그네는 염탐꾼 아닌 염탐꾼 되어
대문 틈사이 보다 못해 담 너머로 훔쳐보지만
오봉서원은 키 작은 나그네를
조금도 허락치 않는다
이럴 때 나그네가 늘 하는 일
돌담을 따라 한바퀴를 도는 것
검은 기와지붕에 산 그늘이 해를 지우고
나그네를 재촉하는데
봄 저녁 따라 새우는 소리 선명하다
밀려오는 어둠만큼이나
오래전 발길 끊긴 서원은 더 쓸쓸해서
나그네 다음 약속하며 발길을 돌린다
오봉서원
1780년(정조 5)부터 세덕사(世德祠)에서 조광익(曺光益)의 향사를 올렸다. 1790년(정조 15) 자손들이 소(疏)를 올려 선생의 증조 청백리 조치우(曺致虞)도 향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며, 그 다음해 함께 향사를 올리라는 윤허가 내렸다. 1795년(정조 19)에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의(公議)로 향사할 뜻을 태학(太學)에 통문하여 청효사(淸孝祠)라 현액하고 춘추로 향사하라는 답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처음으로 격을 높여 오봉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의 재숙을 위한 재실을 세워 오봉서당이라 칭하였고, 1988년 청효사를 다시 설립하여 그 전의 현판을 다시 붙이고 신문(神門)을 입덕문(立德門)이라 편액하였다. 1989년에는 위판을 봉안하고 오봉서원을 복원하였다. 1997년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하여 옛날의 모습대로 원위치에 중건하고 청효당(淸孝堂)을 실학당으로, 효우당(孝友堂)을 독지재(篤志齋)로 바꾸었으며, 정문을 숭유문(崇儒門)이라 현판하였다.
취원당(聚遠堂)과 오봉서원(五峯書院)
曺 錫 鍾 [전 京畿大 교수]
고향을 떠나온 지도 반백 년이 지났건만 지금도 내가 태어나 잔뼈가 굵은 고향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 자랐고 선대들의 묘소가 있는 내 고향은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다. 그곳은 논밭 농사에 의지하고 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고향 마을 서쪽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남쪽으로 나 있는 마을을 굽어보며 동쪽을 향해 우뚝 서 있는 가장 크고 오래된 건물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오봉서원이다. 나는 서원 앞으로 나 있는 작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으로 50m 정도 떨어져 서원과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집에 살았던 터라 집에서도 서원의 처마가 빤히 보였고 육중한 대문 여닫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었다. 오봉서원은 한 여름에는 드넓고 시원해서 마을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쉬어가거나 아니면 목동이나 초동들이 모여 놀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나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에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안식처가 되었던 이 서원이 언제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세워졌는지를 더듬어봄으로써 고향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이곳 오방동에 제일 먼저 우리 일가 조문(曺門)의 보금자리를 트신 분은 나의 13대조인 취원당(聚遠堂, 휘 조광익(曺光益), 다른 호는 竹窩, 자는 可晦)할아버지이시다. 취원당선생께서는 좌참찬(左參贊) 노재(魯齋, 휘 曺允愼)와 이조판서를 지낸 장말손(張末孫)의 손녀이자 장중우(張仲羽)의 따님인 인동 장씨(仁同 張氏) 사이의 5형제(계익(繼益), 광익(光益), 희익(希益), 호익(好益), 겸익(謙益)) 가운데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한다. 취원당선생이 사시던 시대는 피사로(Pisaro)가 페루(Peru)를 점령하고, 포르투갈(Portugal)이 마카오를 식민지로 삼는 등 세계 열강들이 앞다투어 식민지를 개척하던 때였다. 국내에서는 왜구가 배 60척을 이끌고 전라도의 달량진(達梁鎭)을 침입한 소위 을묘왜변이 있었는가 하면 흉년이 계속되자 관리들이 부패하고 민심이 흉흉해서 황해도 지방에서는 임꺽정이 나타나 불평분자들을 모아 난폭한 도적질로 나라가 골치를 앓던 어수선하던 때였다. 이처럼 나라 안팎이 어수선하던 때에 취원당선생께서는 관직에 나가 나라를 위해 봉사를 하셨고 뿐만 아니라 학문에도 심취하셨던 것같다. 취원당공의 삶을 간략하게 정리한 연보는 다음과 같다.
1537년 경상남도 창원시 북면 지개동에서 탄생
1554년 밀성 박씨와 혼인 (18세)
1558년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 (22세)
1559년 오방동에 조그마한 집(竹窩)을 지어 거처로 삼음 (23세)
1564년 명종 19년 갑자년 별시 을과(別試 乙科) 수석 급제(28세)
1567년 성균관 학유(學諭)에 위촉됨 (31세)
1569년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임명됨 (33세)
1576년 선조 9년 병자 중시(重試) 갑과에 장원급제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으로 임명되고 이내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승진 (40세)
1577년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 (41세)
1578년 5월 5일 임지인 강동에서 평안도사로 재직 중 서거함 (42세)
취원당선생께서는 많은 작품을 남기셨다고 전해지나 대부분 임진왜란과 정유왜란에 불에 타 없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선생의 오세손(五世孫)인 소암공(笑庵公, 휘 曺夏瑋)할아버지께서 얼마 남아 있지 않던 자료들을 오랫동안 공들여 수집하여 1771년에 취원당문집(聚遠堂文集) I, II권으로 간행하셨는데 현재 이 두 권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이 문집에는 어머니와 형제에 대한 시 30여 편과 과거시험에서 지은 글 두 편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남아 있는 이 글들을 중심으로 취원당선생의 일생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기로 하자.
선생께서는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10세 때 소학(小學)을 익히시고 13세 되는 해에 심경(心經)을 배우겠다고 퇴계 선생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에 퇴계선생께서는 학문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소학부터 공부하고 오라 하였다 한다. 취원당선생께서는 “저는 소학은 이미 마쳤습니다”라고 대답하시어 퇴계선생을 놀라게 하였고, 시험을 보아 이를 확인한 퇴계 선생은 취원당선생이 당신의 문하생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던 취원당선생께서는 22세에는 사마양시(司馬兩試: 生員, 進士)에 합격하였고 이 무렵 율곡(栗谷 李珥), 고봉(高峯, 奇大升), 한강(寒岡, 鄭逑) 등과 가까이 사귀기도 하셨다.
이 퇴계 문하에서 수학하시고 등과(登科)하셨지만 “과거(科擧)공부란 학문에 뜻을 둔 젊은 사람이 전념할 것이 못 된다”고 하시면서 취원당선생께서는 벼슬길에 나서는 대신에 조용히 학문에 정진하실 곳을 찾게 되었다. 이에 선생께서 23세 되시던 해인 1559년 진사(進士) 박홍미(朴弘美)의 따님인 부인과 함께 산세가 좋고 앞에는 넓은 벌이 펼쳐진 오방동에 거처를 마련하심으로써 오방동이 훗날 창녕 조씨(昌寧 曺氏)의 집성부락이 되었다. 그 이후 선생께서는 반 평생을 이곳 오방동에서 보내셨는데, 오방동은 오봉(五峯)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이름은 동네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봉우리 수에서 유래된 듯 하다. 멀찌감치 떨어져서 동네를 보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세가 전통적으로 명당이라고 하는 좌청룡 우백호의 모양을 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애기바위가 있는 제일 큰 봉우리가 남동과 남서로 양 팔을 벌렸고 중앙으로 두 개의 능선이 똑 바로 점점 넓어지다가 두 개의 산이 되어 멈춘 곳이 바로 각각 동네를 구성하는 윗마을과 아랫마을의 뒷산이다.
선생께서 26세 되던 해인 1562년에 당신이 거처하는 곳을 취원당(聚遠堂)이라 불렀는데 취원당이란 ‘옳은 것을 모아 무궁하게 쌓아간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친구인 고봉은 ‘멀리 있는 친구를 모은다는 뜻’이 있다고 했다. 선생께서는 사람이 들끓는 번잡한 생활보다는 자연을 벗삼은 오방동에서의 전원생활에 만족하셨던 것 같다. 다음 시는 취원당선생의 이런 태도를 잘 보여준다.
幽居吟 세속을 벗어나
囂塵元不到 번잡한 속진이 이르지 않는 곳
卜築白雲隣 흰 구름 이웃하여 집을 지었네
梅綻千年雪 매화꽃 흐들스레 흰 눈 같구나
松含萬歲春 소나무 한결 같이 늘 푸른 봄이로고
鳥聲風外碎 뭇 새들은 바람 앞에 노랠 부르고
山色雨餘新 산색은 비로 인해 더 없이 싱그러워
幽興難收拾 그윽한 흥취를 가누기 어려워
携琴向水濱 거문고 옆에 끼고 물 가로 간다.
취원당선생께서는 인간이 지녀야 할 도리로 무엇보다 효도와 우애를 강조하셨다. 1576년에는 “사람이 되는 도리는 효제(孝悌: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에 앞서는 것이 없다. 효친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나머지는 볼 것도 없다.”고 하셨다.
선생께서는 35세가 되든 1571년에 부친 상을 그리고 잇따라 다음 해에는 모친상을 당하셨다. 그러자 묘 옆에 오두막(여막)을 짓고 3년 동안을 하루 같이 그 곳에서 슬퍼하며 상주로서의 예의를 다하여 주위 사람들을 감복시켰다고 한다. 아침 저녁 상식(上食)을 드리기 위해 집에 들리는 것을 제외하고 밤낮으로 오두막에서 보내다 보니 건강이 악화되었고 율곡, 고봉, 한강 등 친구들이 편지를 보내 상주로서의 슬픔을 절제하고 건강을 보살피라는 간곡한 부탁을 했을 정도로 선생의 부모님에 대한 효성은 남달랐다. 취원당 문집에는 어머님을 그리는 시가 세 편 담겨있는데, 그 중 하나인 다음 시는 어머니에 대한 취원당의 정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夜夢見慈顔感吟 꿈에 어머님을 뵙고
孤魂化蝶到鄕關 외로운 혼 나비 되어 고향에 이르러
欣見慈顔感淚斑 반가이 자친 뵙고 눈물지었네.
驚起開牕無覓處 놀라 깨어 창을 열어봐도 찾을 곳 없고
鵑聲初歇月窺山 접동새 울음 멎자 달은 지려고 산을 엿보네.
취원당 할아버지의 이러한 지극한 효성은 주위에 널리 알려졌고 그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취원당선생께서 문과중시(文科重試: 문무관에게 보이던 과거 시험)를 보고 임금 앞에 나가게 되었을 때 선조(宣祖)께서 할아버지의 이름을 들으시고 “이가 바로 효자 조광익이냐?”며 알아보았고 정려(旌閭: 효자나 열여가 태어난 고을에 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를 세워 표창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원래 창원 지개동에 세워졌던 정려문이 임진왜란 때 타버렸기 때문에 1634년에 할아버지께서 거처하셨던 오방동 입구에 새로이 정려문이 건립되었는데 지금은 효자정려각(孝子旌閭閣: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58호)이라고 부른다. 정려각의 현판에는 “孝子 朝奉大夫 刑曹正郞 兼 春秋館 記注官 曺光益之閭(효자 조봉대부 형조정랑 겸 춘추관 기주관 조광익지려)”라고 적혀 있다. 당시의 기주관은 역사에 남을 만한 자료를 수집하여 기록하고 편찬하는 사관(史官)으로서 정5품에 해당하는 관직이고 조봉대부는 종4품의 문관 벼슬을 한 사람에게 주는 칭호였다. 그러나 취원당문집에 기주관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마 품계서열이 정랑과 같아 기록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종4품인 조봉대부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아마 취원당선생의 사후에 추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취원당선생께서는 효행에서만 특출 났던 것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에 있어서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아우 되시는 지산(芝山, 휘 曺好益: 1545-1609)공이 당시 경상도사에 반항하였다 하여 모함을 받아 평안도 강동(江東)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형제간에 정이 많았던 취원당 할아버지는 그 아우를 걱정하는 마음을 담은 몇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중에 다음의 시가 있다.
憶舍弟好益謫居江東 귀양간 아우를 생각하며
九十韶光客裏遒 구십 춘광 좋은 봄을 객지에서 보내다니
百年人事摠吾愁 한 평생 인생사가 모두 다 시름이라
輪看世態同雲變 세상사 일고지고 구름 보듯 하는구나
斗覺年光共水流 갑자기 알고 보니 세월이란 유수로다.
鴻斷長空書香香 기러기 끊어지니 네 소식 더욱 궁금
蝶飛孤枕夢悠悠 그리움에 나비 되어 꿈에라도 보고 싶어.
淸風携手知何日 다시 만나 기쁨 나눌 그날은 언제런가.
獨倚高樓送遠眸 누각에 홀로 기대 눈길 네게 보낸다.
결국 취원당선생께서는 그 아우를 잊지 못해 자원하여 외직인 평안도사(平安都事: 관리의 감찰과 규탄을 맡아보는 벼슬)로 부임하였다. 아우가 있는 곳 가까이로 가 서로 술잔을 나누고 귀양살이하는 아우를 위로하며 형제애를 나누었다고 한다.
취원당선생께서 친구분들과도 나누신 우정 또한 두터웠다. 친구분들의 글에서는 취원당 할아버지에 대한 친구들의 우정뿐만 아니라 취원당의 고결한 인품까지 읽을 수 있다. 한강(寒岡)은 퇴계선생 지도하에 공부하다 돌아가 말하기를 “내 이번에 큰 소득이 있었네. 이미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어진 친구(可晦)를 얻었으니 아주 흡족하다.”고 했다. 동강(金 東岡)은 다른 사람에게 보낸 글에서 “근래 후진들 가운데 밀양의 조광익 같은 이는 정말 성실한 선비다. 문장은 나라를 빛낼 만하고, 행실은 남들의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했다. 고봉(高峯)도 일찍이 말하기를 “세상의 학자가 조가회(曺可晦)의 문장을 본 받으면 분명히 표절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고, 가회의 품행을 본 받으면 겉만 번지르르한 속물은 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고 했고, 율곡(栗谷)에게 준 글에서는 “우리들 가운데 조가회 같은 이는 처신이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심성을 논한 글을 보건대 훌륭한 선비 가문에서 나왔음을 알겠다”라고 했다.
취원당선생의 성품은 직접 남기신 글에서도 드러나는데 대나무처럼 곧은 성품에 정의가 아닌 것과는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시던 분이셨다. 별시에서 급제한 글인 사절자수부(死節者壽賦: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자 수한다는 글)를 보면 “남자가 죽었으면 죽었지 어찌 불의(不義) 앞에 굴복할 것이며, 내 차라리 죽음으로 돌아갈지언정 어찌 이름을 더럽혀 몸을 욕되게 하리요.” 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분명히 하신 할아버지의 기개와 굳은 의지가 묻어나는 부분이다.
등과하신후 취원당선생께서는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있어 형조정랑(刑曹正郞:六曹에 딸린 정5품의 벼슬)으로 승진 되었다. 그러나 취원당선생께서는 권력에 연연하지 않으셨고 시류에 영합하려 하지 않았다. 높은 관직에서 오는 권위를 누리기보다는 학문에 전념하기를 더 선호하셨던 것이 문집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당시에는 모함이 심해 높은 관직에 오른다 해도 잘못 되면 유배되어 사약을 받는 일이 허다했으므로 관직에 연연해하기보다 학문에만 매진하셨는지도 모른다. 이런 마음이 다음 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書齋偶吟 서재에서
山外囂塵一掉頭 속세를 잠시 잊고 산속을 바라보며
百年身世理田疇 오래 살아 백년인걸 밭일이랑 할까 보냐
東華夢斷知無累 벼슬길 꿈 접고 보면 폐 끼칠 일 없겠구려
南陌禾長覺有秋 농로좌우 벼 자라니 풍년추수 알겠구나
蘿月松風成宿契 아름다운 자연 경치는 전생의 연분이요
溪鱗澗䔩作新羞 물고기 푸성귀가 산뜻한 반찬이라
棲遲此日饒眞興 은퇴하여 차일피일 참된 흥취 즐기나니
何羨人間有五侯 인간 세상 높은 벼슬 부러워해 무엇 하랴.
취원당선생께서는 세속적인 권력을 초월할수 있었기에 아우가 있던 평안도사에 자원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와의 우애를 나눌 시간도 잠시, 그 동안의 마음고생으로 병을 얻어 임지에 부임한지 1년이 채 안 되어 아까운 나이인 42세(1578년 5월 5일)에 할아버지께서는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 교통사정이 나빠 장례행렬이 밀양으로 갈 때 경상북도 상주에 도착하자 상주부사 정곤수(鄭崑壽)가 조문(弔文)을 지어 올렸는데 이 때가 6월이었다고 하니 밀양 오방동에 닿기까지는 적어도 두 달은 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취원당선생께서 돌아가시자 선조(宣祖)는 “조광익의 효성은 하늘이 내린 것이다”라고 하고 그 효심을 기리기 위해 모범이 되는 충신, 효자, 열녀를 엄선하여 편집한 책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선생의 행적을 기록하게 하였다. 한편 할아버지와 지산 형제의 남다른 우애에 감복해 하던 강동사람들은 가까운 친척을 잃은 듯 달려가 애도를 표했고 그것도 모자라 강동(江東)의 흙을 싸 들고 수 천리 길을 걸어 장례에 참여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유해는 고향으로 옮겨져 안장된 뒤라 싸들고 온 흙을 봉분에 얹고 나머지 흙으로 둔덕을 쌓고 대를 심었는데 뒤에 사람들이 이를 강동에서 가져온 흙으로 만든 언덕이라고 강동구(江東丘:경상남도지정문화재 제120호 기념물)라 부르고 1834년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강동구비를 세웠다.
강동구 비각
그러면 취원당 선생의 묘소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는 오봉서원(五峯書院)이 언제 어떻게 세워졌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오봉서원은 오방동의 우백호에 해당하는 서편 끝에 자리하고 있다. 서원 자리는 원래 취원당 선생께서 죽와를 지어 학문에 전념하시던 곳이다.
1780년(정조 5년)부터 세덕사(世德祠)에서 취원당의 향사를 단독으로 올렸고 뒤에 이름을 오봉사(五峯祠)로 바꾸었다. 1790년(정조 15년)에 자손들이 소를 올려 그의 증조이신 정우당(淨友堂, 휘 曺致虞: 1459-1529, 대구부사로 재직 시 청렴 결백한 관리로 인정받아 청백리에 등록 됨)과 함께 향사 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받아 1791년에 함께 향사를 올리게 되었다. 1795년에 밀양 사림(士林)들이 취원당의 후손들만의 향사가 아니라 지방의 사림들도 함께 향사 해야 한다는 뜻을 태학(太學)에 건의한바 청효사라는 현판을 달고 춘추로 향사 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청효사(淸孝祠)란 이름은 정우당의 청백봉공(淸白奉公: 청렴 결백하게 나라와 사회에 봉사함)과 취원당의 효우정가(孝友政家: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다하여 가정을 다스림)의 거룩한 정신을 숭상한다는 뜻에서 ‘청백봉공(淸白奉公)’과 ‘효우정가(孝友政家)’의 첫 글자인 청(淸)과 효(孝)의 첫 두 글자에서 따 온 것이다. 다음 해인 1796년에는 건물을 증축하였고 이름도 격을 높여 오봉서원으로 하였다.
청효사
1780년에 창설된 오봉서원은 향사와 사림들의 문학모임과 교육의 장소로 이용되어 오다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허물어졌으며 1871년에 후손들이 제사를 모시기 위해 재실을 세워 오봉서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후진양성을 도모하였다. 1988년에 청효사를 다시 세워 그 전의현판을 다시 붙였고 다음 해인 1989년에 향사도 받들었으며 오봉서원도 복원하였다. 1997년에는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하여 옛날의 모습대로 본래 자리에 중건하고 강당이 완성되어 당과 제를 각각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학문이라는 뜻과 조상들의 훌륭한 뜻을 독실히 이행한다는 의미로 실학당(實學堂)과 독지재(篤志齋)라 명명하였고 정문도 숭유문(崇儒門)이라는 현판을 달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취원당선생께서 조금만 더 오래 사셨더라면 더 높은 관직에도 오르고 그보다 더 훌륭한 학문의 업적을 쌓았을 텐데 단명하신 것이 못내 아쉽다. 그나마 좋은 글을 남겨 후손들이 부모형제간의 도리를 본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선현들의 신주를 모시고 선비를 양성한다는 취지로 세워진 서원들이 본래의 취지를 잃고 폐단의 온상이 되자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오봉서원은 오늘날까지 남아 후손들에게 인간의 도리를 깨우쳐주고 있다. 교육기관으로서의 본래의 기능은 상실했지만 옛 조상들의 설립정신만은 간직한 채 우뚝 서 있으니 후손인 우리들에게 커다란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취원당선생과 거의 500년이란 긴 시간상의 차이를 두고 세상을 살고 있지만 선생이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형제간에 우애는 인간사의 기본이 되는 덕목이라는, 세월을 뛰어넘는 진리를 할아버지께서 전해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 없이 내가 있을 수 없고, 과거 없이 오늘이 있을 수 없듯이 가정에서 효와 우애가 없이 어찌 사회와 나라가 굳건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오랜 세월에도 말 없이 묵묵히 서 있는 청효사와 효자정려각이 취원당선생께서 몸소 실천하신 효우정가(孝友政家)의 참 뜻을 전하고 있어 다시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참고문헌
1. 취원당선생문집. 오봉서원. 1995.
2. 정우당선생실기. 정우당선생실기국역간행위원회. 2002.
3. 오봉서원지. 오봉서원. 1998.
4. 밀양지. 밀양문화원. 1987.
5. 한국사연표. 을유문화사. 1970.
6. 남궁원, 강석규. 세계사. 일빛.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