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다는 말 모자라는 그분 문익점
김 익 택
살벌한 원나라 감시 피해
붓 뚜껑 숨겨온 목화씨 몇 알
목숨 걸고 감추고 오느라
그분 가슴은 이미 초 격정
얼마나 떨렸으며
얼마나 조마조마 했을까
무사히 조국에 가져가면
헐벗은 백성
따뜻한 겨울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또 얼마나 가슴이 벅찼을까
그분의 맘 만분일 헤아릴 수 없을만큼
감사의 말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디지털 시대에도
의복 혁신이 삶의 혁신인데
세계 패션 리드 우리나라
모직회사 사장
디자이너가 그분만 할까
고맙고 고맙습니다
그 말 밖에 못하는 그것조차
부족하고 미안할 뿐
대구 남평문씨 세거지의 봄나들이
김 익 택
돌담은 토속적이어서 정감이 넘치는데
까치발을 들어도 한참을 넘어선 돌담이
권위적으로 느껴져
긴 골목길을 걸어가는 동안
저 담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그네 짧은 뇌리
더 보고 싶은 생각이 담을 뛰어 넘는다
하지만
나그네를 맞이하는
검은 대문은
코비드19 전염방지로 출입금지합니다
글씨가 나그네를 노려본다
건양다경 입춘대길 붙여놓은 축문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발길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나그네 멀리서
검은 골기와 지붕을 한참을 바라보며
다음을 약속할 수밖에
문익점님의 슬픔
김 익 택
첫 서리 내리고
찬바람 숲 가지를 바스락거릴 때
눈 송이처럼 피던 목화
그 목화를 딸 때 마다
가슴에 새겼던 이름 하나
문익점
첨단 패션 거리
서울 명동
6,25의 아픈 삶의 거리
부산 광복동시장
옷을 파는 사람
옷을 사는 사람
옷을 만든 디자이너 프로필 알아도
문익점을 모르지
청계천 돌 틈에 연어 한 마리
돌아온 환경 놀라워해도
인왕산 계곡 모르듯
명동을 거니는 사람
너도나도 덮고 자는
캐시미론 이불 알아도
솜 이불 모르는 사람들
그옛날
뜨거운 가슴 문익점
조국애를 모르지
목화가 묻다
김 익 택
어느 고관 집 앞 외롭게 핀 꽃
눈에 익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집 지나칠 때마다
도둑처럼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기를 두 달
늦은 가을
마른 햇볕에 잎이 하나 둘 떨어지고
가지가 우는 바람에 서리가 내릴 즈음
거뭇거뭇한 씨앗에 터져 나오는
새하얀 보송보송한 털
목화였다
어릴 때 그렇게 많이 따고 작업을 했는데
울 할머니 실을 만들어 무명 배를 짜고
울 엄마 솜이불을 만들었는데
불과 15여년만에 깜박 잊고 말다니
미안해 미안 해
…
아!
일찍이 삶의 마지막이
저렇게 찬란한 희생 또 어디 있었던가!
인간의 삶
어머니 아닌 어머니
우리가 입고 덮고 살았던 삶
거룩한 희생
한 푼의 보상도 없이
화학섬유 앞에 무참히 무너지고
마침내
생명의 존재를 잃어버린
찬란한 슬픔은
고관의 집 앞에서
과거의 삶을 묻고 있다
찔레꽃 보은
김 익 택
개울가에 흐드러지게 핀
하얀꽃 찔레는
그 옛날
지지리도 가난했던
보리고개
배고프다 우는 아이
엄마 가슴에 피는 꽃
먹어도 먹어도
채우지 못하는 허기
누나는 동생입에 물리며
단맛보다 떫은 맛을
맛있다며 달랬지요
칡뿌리 쑥 냉이로
채울 수 없는 주린 배를
진달래와 찔레꽃으로
물오른 송진으로
허기를 채우고
찔레 피리 소나무 피리
불며 놀았지요
남평문씨 세거지의 능소화
김 익 택
세거지의 능소화는
그 옛날
숨죽였던 숙녀
시대의 반항인가
시대의 저항인가
도둑 고양이 아니면
도저히
뛰어넘을 수는 없는
높은 돌담을
쉬이 넘어
가는 사람 오는 사람
희롱하듯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아름드리 푸른 잎은
바람 불면
소녀 단발머리같이
찰랑찰랑
정숙한 꽃잎은
한들한들
왕비 가체머리에 핀
한송이 꽃같이
삼복더위에 아랑곳 않고
한여름 서릿발같이 독하게 핀다
세거지 연지에 부부 송
김 익 택
세거지 연지
한가운데
작은 섬 부부 송은
천년 만년
변함없는
의복의 소중함 같이
그 옛날
문익점님
정신 하나
찾아오는 사람
가슴에 잊었던 애국
심어주고 있다
세거지 칠월의 꽃
김 익 택
칠월 뙤약 볕
세거지에 피는 꽃
연꽃은
물속에서 웃고
능소화는
담장에서 웃고
백일홍은
정원에서 웃는다
남편문씨 세거지 사적 개요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터를 닦아 남평 문씨 일족이 모여 살던 곳이다. 원래 절이 있던 명당터를 구획하여 집터와 도로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지금은 조선 후기의 전통가옥 9채와 정자 2채가 남아 있으며, 도로에 접한 부분에는 담을 쌓았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지당·인수문고를 들 수 있다. 수봉정사는 세거지의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 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지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이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였으나 후에 크게 늘려지었고, 도서열람을 위한 건물도 따로 지어놓았다.
주변경관이 아름답고 도로망도 편리하게 정리되어 있는 옛 마을이다.
문익점
정의
고려후기 목화 종자를 도입하고 재배하여 전국에 보급한 문신.학자.
개설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 출생. 문숙선(淑宣)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禀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고려사』열전 문익점전에 의하면,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원에 체류한 채 덕흥군 편에 붙었으나 덕흥군이 패배하자 고려로 귀국하였다. 문익점이 실제로 덕흥군을 지지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중국[元] 승려 홍원(弘願)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또, 문익점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시험 재배했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고, 여기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져 있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조식이 쓴 『목면화기(木棉花記)』에 있으며, 이 책은 규장각도서에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신동국여지승람
연려실기술
목년화기
삼우당 실가
『농림수산고문헌비요』(김영진,한국농촌경제연구원,1982)
집필자
집필 (1995년)
박성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도천서원(陶川書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