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님의 640년 전통

 

김 익 택

 

한 가문 대대로 지켜온

이오님의 불사이군 정신

육백사십년

 

세계사 통틀어

어느 한가문이 한집에서

육백사십년 이어온 사례가 있었던가

 

나라 못하고 왕족도 못하는 전통을

여기 함안 고려동마을

이오님 고고한 정신을

19대를 이어오고 있다

 

이오님이 터를 집은 지 육백사십년전

19대가 내려오는 동안

몽고침입 임진왜란 6.25전쟁에

가택은 소실되어 다시 지어도

 

이오님의 불사이군 정신

청천벽력같이 살아

학문에 열중해도 벼슬하지 않았던

조선 5백년

 

그동안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족사적으로

억장이 무는지는 일 수 없이 많았을터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동서양의 정설인데

 

그럼에도 장손에서 장손으로 이어 온

전통을 생각하면

이오님 불굴의 정신도 존경스럽지만

19대 한분 한분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상상 범위를 벗어난 가족사는

대단하다 그 말보다

거룩하다 아니 할 수 없고

존경한다 그 말 보다

공경한다 아니 할 수 없다

 

 

고려동 19대 장손부부

 

김 익 택

 

 

주인 없는 폐가는

잡초는 먼저 안다 했던가

조선시대 아카데미였던

서원들은 주인 없어

대부분 잡초들이 무성했지만

 

삼천평 넓은 집 고려동 한옥은

집마다 깨끗하고

마루마다 반질반질하다

텃밭에는 체소가 가득하고

화단에는 꽃이 만발이다

 

예순을 훨씬 넘어 보이는

19대 장손 부부

천상 부지런한 농부 다름없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해도해도 모자라는 일

잠깐 허리 펴며 낯선 이방인에게

들어와서 편하게 구경하라 하시고는

종부는 고추밭 풀을 뽑고

장손은 꽃밭에 물을 준다

함안 고려동 마을에서

 

김 익 택

 

 

 

 

촉촉하게 내리는 비

골기와를 흘러내려

마당을 적시고

텃밭을 적시는데

 

고려동 19대손

손길은 더 없이 바쁘다

 

대문 밖 자미화는

산허리를 훑고 가는

안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사랑 그 세월 앞에

 

김 익 택

 

 

 

그 사람 위해서라면

물 불 가리지 않고

목숨까지 아깝지 않은

전부였던 사랑

영원한 진리 같았는데

시간에 바래지고

기억에 소멸하는 세월

그 앞에

한편의 영화같이

겪어도 아닌 듯 남의 일 같다

고려동 자미화의 위로

 

김 익 택

 

 

 

 

고려 망하고 새 왕조 조선

두 임금 섬길 수 없어

고향 떠나 강원도 산골 두문동에서

다시 남쪽으로 숨어들었던 곳

함안군 산인면 모곡

 

삼천평 대지에 담장을 쌓고

밖은 조선 일지라도 안은 고려라고

고려동학비를 세우고 절개를 지킨

이오님

 

새왕조에서 벼슬은 하지 말라는

그 유지 따른 오백년 15대

남 모르는 고난 지켜본 자미화만 알까

 

세월속의 깊은 사연

아파서 다 말 못하겠는 듯

푸름 속에 붉은 꽃이 입을 꼭 다물었다

 

나그네 눈이 따가워서

땀을 훔치는데

속절없이 떨어지는 땀방울이

자미화 붉은 꽃에 떨어진다

 

나그네 고개숙여 한참을 보는데

자미화는 괜찮다는 듯

엷은 꽃이 더 붉었다

 

2021년8월15일은

 

김 익 택

 

 

 

더위 가뭄 장마보다

지독한 인간 폭정의 시대

오늘 8월15일

이제부터 꽃피고 열매 맺는

시대의 시작이라고

더는 아파하지 말고 울지도 말고

행복한 앞만 보면 살자고

속지도 말고 속이지도 말고

옳고 그름

정확히 판단하며 살자고

가족끼리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그 옛날 단군님 말씀

제세이화 홍익인간의 정신

나도 나도 한시도 잊고 않고

죽는 날까지

맥문동 그대는

 

 

8월 꽃구경은

 

김 익 택

 

 

 

 

 

팔월 능소화 울고 간뒤

백일홍이 웃더냐

입막고 코막은 사람들

서로서로 의심하고 방콕하는 사이

올 유월은

연꽃 구경은 못하고 칠월

끝물 능소화와 작별하고

8월 백일홍 꽃구경을

더위와 코비드19 델타바이러스가

자재하라 한다

고려동 자미화 품속

김 익 택

 

 

 

가만있어도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리는 8월초

고려동 자미화는

어서 들어와서 쉬라고

그늘을 내 준다

 

나그네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며 올려보는데

파란 하늘 사이

보들보들하게 핀 붉은 꽃이

자미화가 밖으로 불러낸다

 

나그네 밖을 나와 둘러보니

여기는 꽃봉우리

저기는 활짝 핀 꽃

세상에 더 없는 꽃세상이다

 

꽃 하나하나 모여 한송이가 되고

그 한송이 여러 송이가 되어

나무 전체가 한송이 꽃이다

나그네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진다

이오님과 자미화

 

김 익 택

 

 

 

 

한뿌리에서 갈라진

수십개 가지

그 가지 끝자락에

활짝 핀

수백개 꽃 봉우리가

19대를 내려온

이오님 후손같이 무성하다

 

 

함안 고려동 유적지

 

 

함안 고려동 유적지(咸安 高麗洞 遺蹟址)는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적지이다. 1982년 8월 2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56호 고려동유적지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개요 

고려 후기 성균관 진사 오(李午) 선생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로 결심하고 이곳에 거처를 정한 이후 대대로 그 후손들이 살아온 장소이다.

이오는 이곳에 담장을 쌓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비석을 세워 논과 밭을 일구어 자급자족을 하였다. 그는 아들에게도 조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기가 죽은 뒤라도 자신의 신주를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그의 유언을 받든 후손들은 19대 60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 오고 있다.

현재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비, 고려동담장, 고려종택, 자미단, 고려전답 3,000여 평, 자미정, 율간정, 복정들이 있다. 후손들이 선조의 유산을 소중히 가꾸면서 벼슬길에 나아가기 보다는 자녀의 교육에 전념함으로써 학덕과 절의로 이름있는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현지 안내문 

고려 말에 성균관의 진사였던 이오 선생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 절의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백일홍이 만발한 이곳을 택하여 담을 쌓고 거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고려 유민의 거주지임을 뜻하는 고려동학이란 비석을 세웠다. 여기에서 담안 혹은 장내라고 하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2]

세상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고, 아들에게도 새 왕조에서 벼슬하지 말 것과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담 안에 주거와 우물 전담 등을 마련함으로써 후손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는 터를 닦았다. 이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은 600년이 넘게 이곳에서 살아왔고 고려동이라흔 이름도 전하고 있다. 현재 이 마을에는 재령 이씨 후손 30여호과 모여 살면서 선조의 뜻을 기리고 있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 고려동 담장, 고려종택, 자미단, 고려전 3,000여 평, 자미정, 율간정, 복정 등이 있었으나, 이들 건물은 한국전쟁 동안에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이후 복원되었다. 호상공의 생가로 알려진 주택만이 제 모습을 지키고 있으나, 그마저 200여년 전의 것이라고 한다.

 

 

내용

경상남도 기념물 제56호. 이 곳은 고려 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이오(李午)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고려의 유민으로 절의를 지키기로 결심하고 백일홍이 만발한 이 곳을 택해 거처를 정한 뒤 그 후손들이 살아온 장소이다.

고려가 망하자 선생은 여러 현인들과 송도의 두문동에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거처를 찾던 중, 산간벽지에 띠만이 우거진 숲 속에서 백일홍이 만발한 것을 보고 그 자리에 마을의 터전을 일궜다. 그 자리는 오늘날 자미단(紫微壇)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오는 끝까지 고려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해 은거지 주변에 담을 쌓아 밖은 조선의 영토라 할지라도 안은 고려 유민의 거주임을 명시하는 ‘고려동학(高麗洞壑)’이라는 표비를 세웠다. 여기서 ‘담안’ 또는 ‘장내’라는 마을이름이 유래되었다.

이오는 세상을 뜰 때까지 조선에 벼슬하지 않았다. 아들에게도 신왕조에 벼슬하지 말 것과 자신의 신주를 이 곳을 떠나 딴 곳으로 옮기지 말도록 유언하였다. 또한 담 안에 주거를 만들고 우물을 파 전답을 개간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는 후손들의 터를 만들었다.

선생의 유언을 받든 종손들은 19대 600년에 이르는 동안 이 곳을 떠나지 않았고 이에 고려동(高麗洞)이라는 이름으로 오늘까지 이어왔다. 현재 이 마을에는 30호의 후손들이 재령이씨(載寧李氏) 단성의 동족마을로 그 순수성을 지켜가고 있다.

마을 안에는 고려동학표비(高麗洞壑表碑), 고려동(高慮洞)담장, 고려종택(高麗宗宅), 자미단(紫微壇), 고려전(高麗田) 30,000여 평, 자미정(紫微亭), 율간정(栗澗亭), 보정(鰒井) 등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건물들이 6·25전쟁 때 소실되어 이후 재건된 것이다.

 

참고 자료

 

· 함안 고려동 유적지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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