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생각

김 익 택

 

 

산허리 나무들이

하나 둘 헐 벗는 11월이 오면

연꽃 조화 속에 아버지를 모시고

고향 가던 그 날이 어제처럼 선 합니다

 

20년이 넘도록 단 한번도 꽃 한 송이 선물한 적 없는 자식은

죽고 난 뒤 하양 노랑 파랑 조화로 단장하여 버스 타고 갔지요

그 날 따라 비포장 도로 버스는 왜 그리 덜커덩거리고

날씨는 또 왜 그리 춥던지

양심의 가책이 한결 더 아프게 했지요

 

장지까지 가는 동안

대나무에 나부끼는 만장 같은 것 하나 없고

생목이 터지는 곡 소리마저 초 겨울에 찬바람에 묻혀

잃은 슬픔 더 아팠지요

들려오는 소리라곤 탕탕거리는 경운기 엔진 소리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천수경을 외는

스님의 청아한 목소리 목탁 소리 뿐이었지요

 

아버지를 땅에 묻고 돌아오는 서쪽 하늘은

저녁노을과 상여 꽃 타는 불꽃이 서럽고

타닥 탁 탁 대나무 지팡이 마디 터지는 소리는

불효자식 가슴에 퍼붓는 질타의 소리로 들렸지요

아버지 돌아가신 지 어언 40년

내 나이 환갑을 넘기고 보니

 

지금까지 산 빛

들 빛 하늘이 아픈 빛으로 남는 것은

늙음이 다시 한번 아버지를 더 깊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불효자식 속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고향의 소리

김 익 택

 

그때는 허물어져가는 초가집

방안에서도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돌담 골목길에서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로 넘쳐났지요

 

곰방대 물고 담배 피던

할아버지의 미소는

아름다웠고

길쌈 삼던 할머니 손길은

부드러웠습니다

 

앞마당을 배회하는 암탉소리는

정다웠고

동네가 떠나갈 듯 짖던 똥개소리는

반가웠고

마당에 메어둔 어미 소 울음소리는

한가로웠습니다

 

동네를 가로질려 흐르는 냇물은

거울처럼 맑았고

코끝을 스미는 바람 냄새는

풀꽃처럼 향기로웠습니다

 

돌담 너머 아이들 책 읽는 소리는

아침처럼 생기가 흘렸고

처녀를 부르는 총각 휘파람 소리는

소쩍새소리처럼 애달팠습니다

 

장다리가 튼실한 남정네의 쟁기질소리는

힘이 넘치고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 등의 아이 울음소리는

요령처럼 요란했습니다

 

늦은 밤 골목길에 술 취한 동네어른 노래 소리는

구슬펐고 정지간 며느리 흐느끼는 소리는

애처로웠습니다

 

그래도 그때 마을 사람들은

가난해도 마음만은 순수를 잃지 않았고

인정은 알을 품는 어미 닭처럼 따뜻했습니다

세월 가면

김 익 택

 

 

세월 가면

절실히 미워서 기억하는 것도 있고

절실히 고마워서 기억하는 것도 있다

그것 말고도

아름답고 아프고 외롭고 쓸쓸해서 기억하는 것들은

문득문득 떠오르는 추억이 되는 것인데

세월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고운정은 햇빛에 바래고

미운정은 바람에 닳아

한데 어울려 어깨동무하고 다니는 아이처럼

친구가 된다

이렇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운정은

되돌려주지 못한 앙금은 시간의 뻘 밭에서 스스로를 정화되고

고운정은 두고두고 갚으려던 고마움은 맘의 빗으로 흐르다가

비 내리는 연 밭에서 중얼거리며 걸어가는 스님의 발자국이 된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가면 고운정은 그립고 아쉬운 세월의 친구가 되고

미운정은 얄밉고 아쉬운 바람의 친구가 되어 옛날에 그런 일 있었지ㆍㆍㆍ

세월 가면

시작은 달랐지만 서로 소통하는 이야기가 되어

전설처럼 풀어져 나오는 추억의 얘기가 된다

 

내 고향 내와리

 

김 익 택

 

 

산이 높아 공기 좋고 계곡 깊어 물 좋은

내와리 내고향은 그 흔한 사찰 하나 없는

첩첩산중 오지마을 입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외롭고 적적해서 어떻게 살까

남들은 그렇게 말을 하지 모르지만

된장 고추장 진득한 고생 냄새 모르면

참 고향 향수 모릅니다

 

찌든 삶에서 우려나는 도타운 정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곳에 있는 지명 풀 한 포기 얘기만 들추어도

가슴 설렙니다

 

내 어릴 때 겨울은

골목바람 세차게 먼지 일으키고 손등이 갈라 터지고

따뜻한 옷 신발 없어

감기몸살 열병 친구처럼 고생스런 삶이었지만

고생이 많은 만큼 추억 또한 많습니다

 

지금은 집도 들도 변해서

이 골목 저 골목 추억을 더듬는

그들에게 내가 이방인

가고 없는 세월의 향수가 짙을수록 빗이 되어

마음이 아쉽고 그립고 무겁습니다

 

1980년 대 그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차장아가씨가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며 스톱 오라이 외치던 만원버스를 타보지 않는 사람은 고생이 뭔지 모릅니다. 출퇴근 때마다 달려오는 버스를 향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면 차장아가씨는 자신의 몸집보다 큰 먹이를 집어 삼키는 뱀 아가리처럼, 좁은 문 속으로 등과 어깨로 꾸역꾸역 밀어 넣으면 버스는 미련 없이 달립니다. 좁은 공간에서는 가슴과 가슴이 압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래도 사람들은 버스에 올라 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의 한숨 소리 가벼웠습니다. 버스 실내는 도시락 반찬냄새와 땀 냄새와 방귀냄새가 뒤섞여서 악취가 코를 찌르고 사람들은 진흙 속에 물고기처럼 버스 천청보고 숨을 쉬었지요. 급정거 할 때마다 앞사람 뒷사람 뱃살이 김밥 옆구리 터지듯 부대끼는 것은 다반사, 학생들의 책가방은 먹을 것을 쥐고 절대 놓지 않는 부대자루 속 원숭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끼어서 가방 끈이 떨어지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이었지요. 매일같이 그런 만원버스를 타 보지 않는 사람은 배고픔이 뭔지 가난이 뭔지 모릅니다. 1970년 우리나라산업은 가발공장 신발공장 아니면 섬유공장 합판공장뿐, 일 할 사람은 넘쳐나서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였지요. 그래도 貧村 사람들은 자식공부 시킬 수 있다면, 그곳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환경일지라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대도시로 모여들었지요. 그들에게 대도시는 희망 보증수표와도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동생들은 형 공부를 위해, 형 누나들은 동생 공부를 위해, 공돌이 공순이 생활에도 자긍심 하나는 대단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지금, 교육강국 기술강국 경제부국으로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래도 그들도 한 몫 했다는 사실, 부정 할 수 없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겪고, 6.25를 겪은 그들의 삶, 가난이 국론 분열과 외세침입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 우리 모두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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