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품은 오연정
김 익 택
비탈진 좁은 길 올라서면
밀양강을 내려 다 보고 있는
작은 정자 오연정
대문을 지키는
아름드리 은행나무
울타릴 지키는
우람한 소나무
정자와 시간을 품은
오랜된 백일홍
정자 뒤
넉넉한 단풍나무
모두 오연정의 산 증인
명예는 있어도 욕심이 있었던가
덕망은 있어도 권력이 있었던가
단정한 모습
내면의 깊고 단단한 정심이
나그네 사심을 일깨운다
입다물고 귀 닫고
눈감고 있어도
가슴을 열어 놓은
아는 사람아는
그 누군가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연정 연서
김 익 택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일까
내가 자란 집 아닌데도
내가 태어나 자란 집 같다
닫힌 방문은 꽉 다문 입
현판은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눈
웃자란 잡초
손 때를 잃어가는 집
정자 곳곳마다
삶의 진리
정신 잃지 않는
침묵이 전하는
덕망과 명예가
독해를 못한 오랜 된
한권의 책이 아닌가
영풍루에 앉아서
김 익 택
그곳에 앉아 있으면
은근설쩍 올려 놓은
부끄러운 내 양심이
그 시대에
양양반이 되고
시인이 되고
학자가 된 느낌이다
사방 팔방 시야 들어오는
오래된 나목은
굽고 휘어져서
삶이 점철을 느낄 수 있고
푸른 잎사이 붉은 꽃은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보잘 것 없는 꽃이지만
모여서 힘이 되는 구성원같이
뭉쳐서 한송이로 보면
또 다른 아름다운 한송이 꽃이다
단결과 화합 그리고 결속
의미를 새기면
사회의 단면을 보고 있는 듯
힘든 여름에 피는 이유를
내 삶에 비추면
어줍잖은 내 양심을 뭉클하게 한다
오연정은 나에게
김 익 택
느낌이 좋은 집
정감이 가는 집
그것을 너머
배우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집
포근하고 조용하게
나를 품는 집
오연정은
나를 믿고 나를 아끼고
나는 오연정을
다듬고 가다듬는
사이가 될 것 같은 집
내가 모르는 어느 시대
살았거나 동경했던 집같이
처음 만났지만 낯설지 않다
인격과 인품이 베어 있는 집이다
마음의 빈 그릇
김 익 택
버려도 버려지지 않는
내 몸의 불쾌지수는
여름장마에도
상승하는 것같이
꼭 껴안고 있어도
달아나려 하는
내 소원은
연중 바쁘게 쫓아도
내 정신의 그릇은 늘 고갈이다
오연정의 여름 감회
김 익 택
가파른 시멘트 오르막길은 움푹 파여
비포장길 다름없었으나
오연정 정문 앞은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범상치 않음을 알리는 듯
나그네를 압도하고도 남는다
낙엽과 잡풀이 잠식하고 있는
길 따라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래전 방치된 생활가구들이
집안에 쌓여 관리가 아쉽다
안 체를 지나 오른 쪽 쪽문을 열면
마당한가운데 아담한 모과나무
정자 양쪽 풍성한 백일홍 꽃
담 너무 왕성한 노송
정자 뒤 펼쳐 놓은 부체같은 단풍나무
저 아래 흘러가는 밀양강
정자 오연정은
겉 보기엔 기대치가 전혀 없는
그냥 옛날 기와집이지만
문 열고 들어서면
펼쳐지는 풍경은 또 다란 세계
여기가 바로 비밀정원 아닌가
이끼 낀 바위 하나
오래된 나무 하나
그곳에 있어 평화와 고요가 깃들어 있다
오연정은 작지만 꿈이 담겨있고
작지만 큰 삶의 의미가 느껴진다
풍경에 감화되면 마음도 닮는 걸까
나그네 불안한 맘 그 자리에
미안한 함과
한 없는 존경과 고마움이 깃든다
오연정 정자 앉아서
김 익 택
시를 읊는 것 보다 노래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청춘가를 불러야 하는 가
사랑가를 불러야 하는 가
태평가를 불러야 하는 가
창부타령을 불러야 하는 가
무엇을 불러도 어울리는 정자
목석이라도 가슴을 파고드는 이 애잔함
가만있으면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덧없는 세월의 아쉬움에 눈물도 펑펑
사방팔방 들어오는
늙은 백태 백일홍의 붉은 꽃이
어쩜 저렇게 고울까
시간이 남겨놓은 시간의 때
위로하듯 달래는듯
가지 끝 붉은 꽃은
꽃이 아니라
세월의 서리서리 맺힌 눈물
집이 아니라 정을 품었고 그리움을 품었다
백일홍 비밀화원
김 익 택
누가 보면 나무랄까
주인 없는 빈 정자에 앉아
경치를 즐기는 것도
풍경을 도둑질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
마음 같아서는 차 한잔이라도
마시고 싶고
시원한 마루바닥에 드러 누워 보고도 싶다
오래된 노송과
오래된 배롱꽃과 교감하고 싶지만
내 집 아니면 허락을 받아도 남의 집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다
울 너머 우람한 푸른 소나무
울 안의 울창하게 핀 배롱꽃을
내려다보는 운치가
여기가 백일홍 비밀화원 아닐까
자문자답에 방점을 찍어본다
그대는 나에게
김 익 택
그대 나에게 온 세상을 밝히는 태양 아니지만
그대는 나의 행복 바이러스
그대가 무엇을 하던
내 가슴에서 뜨고 지는 태양이죠
그대 삶의 등불 아니지만 사랑의 등불이죠
그대가 어디에 있던 나의 해바라기
그대 내 앞길을 훤히 밝혀주는 등불 아니지만
내 가슴의 등불이죠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가버린 사랑일지라도
그대는 나에게 비를 맞고 웃는 장미 한송이
그대를 알아서 행복한 선물은
She is gone 아니라 She has gone
마지막이라는 말은
내가 그림자를 잃은 후의 일
신이 가히 여겨
꽃으로 핀다면 하얀 꽃이 되고 싶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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