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영선생 사초 시대의 그늘
김 익 택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쓰고 인용하는 것이 사초의 기본이면 정석 아니던가요
그런데 능지처참이라니
부관참시라니
이런 행위가 한나라의 신하가 조작을 하고
군왕이 할 짓인가요
언제까지 아부를 하는 개가 되어야 하고
먹을 것만 주면 좋아하는 돼지가 되어야 하나요
천자문을 읽지 못하고 소학을 배우지 않는
초동도 옳고 그름을 아는 진실을
군왕이 모르고 신하가 모를까요
학식이 있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고
사람이 할 짓이 아니잖아요
바람이 알고 빛이 아는 진실을 무엇으로 가릴까요
손으로 가릴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은 가릴 수가 없죠
눈 앞에 펼쳐진 세월에 검게 익어가는 건물이
사시사철 늘 푸른 늙은 노송이
지금도 오물을 뒤집어쓰고 싸우는
진보와 보수의 이념 전쟁이
인간사 교훈에 의문을 던지고 있네요
청계서원과 남계서원 방문기
김 익 택
한사람의 스승 아래에서 배우고 수학했던
탁영과 일두 그들의 서원이
친구처럼 형제처럼 나란히 있는 모습
정겹다 못해 아름답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 탐구 성리학
지향하는 꿈 같았던 두 사람
죽음까지 약속했을까
시대의 모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사람은 유배생활에서 죽음과 부관참시
또 한사람은 능지처참으로
몸은 가고
여기 혼으로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오래전 교육기관의 의무 사라졌지만
인성함양은 현대인에게는
내일을 위한 길
세월이 흐름에 더 빛나는 양심으로
정신세계를 밝히고 있다
그렇지 아니한 가
김 익 택
살고 싶다고 더 살고 싶다고
옹고집을 부리는 삶에게
살만큼 살았다고
경고를 하는 것이 세월 아닌가
세월은 미련과 아쉬움 그리움
의지까지 앗아가고
기억을 잊게 하고 몸을 늙게 하는 것이지
그동안 잘 살았다고 감사는 커녕
좀더 살겠다고 아쉬움을 넘어
악을 쓰고 발버둥 치는 삶들에게
하늘은
인간이 어쩔 수 없는 아픔으로
기운을 꺾어버리는 것이지
그대가 하는 말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 하셔야지요
몇 백 번을 들어도 고마운 말
잘 살고 오래 산다는 건
내가 건강 내정신이 온전해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을 때 말인지
그렇지 아니한 가
청계서원 소나무가 알리는 진실
김 익 택
청계서원 앞 소나무 한 그루
온 몸은 뒤틀려 있고
푸른 솔은 더욱 싱싱하다
누가 묻지 않고 설명하지 않아도
그분 인생사
일부분을 보고 있는 듯
죽어야 정의를 세우고
죽어야 아는 삶의 진실에
내 심사가 뒤틀린다
능지처참
김 익 택
죽음 앞에 두려움 없는 삶이 있을까
그것도 자연사가 아닌
사람이 사람을
거짓과 선동으로 정의로 둔갑시켜
인권과 육체를 철저하게 유린해
죽음에 이르는 행위라면
저 세상의 지옥이 그만 할까
그들은 눈 앞에서
없는 죄를 추궁하며
사람이 동물에게 할 짓이 아닌 행위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었을까
갚아야 할 원한이 아무리 클지라도
거짓을 꾸며 죄를 뒤집어 씌우는 일은 안될 일
후일이 두렵지 않다면
사후의 일이 두렵지 않았을까
소나무의 삶의 믿음
김 익 택
누가 밟으면 밟힌 대로 꺾으면 꺾인 대로
반항 아니라 저항으로 점철된 삶
네가 드리운 가지 네가 펼친 솔잎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평범한 나무지만
어느 하나 올곧은 없는 껍질과 가지가
아름답게 보인 것은 극복한 삶의 모습
비바람과 눈보라 폭우와 태풍
가뭄과 한파 의지할 곳은 삶의 믿음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순응은 해도
거절은 할 수 없는 삶이었을 뿐이다
너는 바람 나는 나무
김 익 택
바람이 나무에게 가을 얘기를 했다
고생했으니 이제는 모두 내려 놓아라고
나무가 태양 얘기를 했다
열매가 익는 것도 잎이 떨어지는 것도
네가 하는 것 같지만 너는 태양의 사자일 뿐이다
너에게 의무만 있을뿐
책임이라는 단어를 알았던가
향기를 퍼뜨리는 것도 열매가 떨어지는 것도
너에겐 의미가 없다
언제 고개 숙여 미안함을 가졌던가
반갑다고 먼저 인사를 했던가
감정을 헤아렸던가
심심하면 툭툭치며 지나가고
사정없이 볼을 때리며 달려가는 것뿐
너에게 어울리는 말은 어불성설
그 사실 알기에
너는 바람 나는 나무
주고받는 것은 있어도 바람은 없다
산다는 것이
김 익 택
내가 돌아갈 길은 어디일까
죽기 전까지
단한번도 내 맘 같은 사람
만나지 못했다
없음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소통할 수 있는 사람
한번쯤 만났으면 하는 생각
버리지 못함은 욕심일까
아니 용심이라도 좋다
이해라는 낱말도 있고
포용이라는 낱말도 있으니까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받아드려도
상대방이 받아드리지 못하는
보통상식 보통예의가
이토록 어려울까
싫다고 보지 않고 듣기 싫다고
대화를 단절할 수 없는
평생을 함께 하는 사람
불행인지 행복인지 삶의 시험인지
이유가 그 무엇이던
함께 산다는 것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산다는 게 수수께끼다
삶과 이별 중 어는 것이 정답인지
물음을 던져 놓고도 결정하지 못한 것이
우유부단일까
정답을 말년서도 의문을 던져본다
고택 앞에서
김 익 택
영광과 명예는 아흔 열흘이며 충분 할지 몰라도
충성과 헌신 올곧는 정신은
죽음까지 평생 요구하는 세월
가만 있어도 세월이 가만두지 않음인데
없는 죄 만들어 뒤집어 씌워
죽음으로 몰아넣는 권력의 암투 그 한가운데서
오직 나라위한 일편단심
오백년 지나도 변함없는 저 고옥이 증명하고
저 붉은 백일홍이 쿡 눌러 찍은 인장인양
나그네 두 눈에 들어오는 풍경
시간을 뛰어넘는 디지털시대에도
여전히 인간 군상들의 귀감
스쳐 지나가는 순간적 감상 아니라
한없는 존경을 표하고 싶다
청계서원
조선 연산군 때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1464∼1498)을 기리기 위한 서원이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그의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사건에 연루되어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구경재와 동재, 서재, 홍남문, 솟을삼문 등의 건물이 남아 있고,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서원은 1906년, 조선 성종(1947~1494) 때 사림파를 대표하던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한동안 공부를 한 적이 있던 청계정사靑溪精舍 옛 터에다 유림에서 세운 것이다. 연산군 1년(1495)에는 ‘청계정사’를 세워 유생을 가르쳤고, 광무 10년(1905) 유림들이 그 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뒤 1915년에 건물을 원래 모습으로 고쳐 청계서원이라 하였다.
김일손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생전에 청빈함을 요구하는 청요직을 두루 지냈으나 연산군(1476~1506)때 스승을 비롯한 영남학파 학자들과 함께 조의제문弔義帝文 사건에 휘말려 무오사화로 희생되었다. 글에 뛰어났으며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다. 현재 청계서원에서는 김일손의 위패를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강당 앞으로는 학생들의 거처로서 동재東齋인 역가재亦可齋와 서재西齋인 구경재久敬齋가 있다.
김일손金馹孫(1464∼1498).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고, 아버지는 집의執義 김맹金孟이며, 어머니는 이씨이다.
1486년(성종 17) 생원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이 해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식년 문과 갑과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처음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로 관직 생활을 시작해, 곧 정자正字로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다.
그 뒤 진주의 교수敎授로 나갔다가 곧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가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열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鄭汝昌·강혼姜渾 등과 깊이 교유하였다.
다시 벼슬길에 들어서서 승정원의 주서注書, 홍문관의 박사·부수찬副修撰, 전적典籍·장령掌令·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다시 홍문관의 수찬을 거쳐 병조좌랑·이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의 부교리副校理·교리 및 헌납獻納·이조정랑 등을 지냈다.
관료 생활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사가독서賜暇讀書(재능이 있는 문신들에게 문흥을 위해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하여 학문과 문장의 깊이를 다졌다. 그리고 주로 언관言官에 재직하면서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위하라는 과감한 주장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구파의 불의·부패 및 ‘권귀화權貴化(권세가 있는 귀족으로 됨)’를 공격하고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 결과 1498년(연산군 4)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서 조의제문弔義帝文의 사초화史草化 및 소릉 복위 상소 등 일련의 사실 때문에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 뒤 중종반정으로 복관되고, 중종 때 직제학直提學, 현종 때 도승지, 순조 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다.
17세 때까지는 할아버지 김극일金克一로부터 『소학小學』·사서四書·『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을 배웠으며, 이후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평생 사사하였다.
김종직의 문인 중에는 김굉필金宏弼·정여창 등과 같이 ‘수기修己(자기 자신을 닦으면서 수양함)’를 지향하는 계열과, 사장詞章을 중시하면서 ‘치인治人(남을 다스리는 정치)’을 지향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후자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한편, 현실 대응 자세는 매우 과감하고 진취적이었다. 예컨데 소릉 복위 상소나 조의제문을 사초에 수록한 사실 등에서 정치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세조의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존재 명분을 간접적으로 부정한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극히 모험적인 일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일들이 사림파의 잠정적인 세력을 잃게 한 표면적인 원인이 되었다.
저서로는 『탁영집濯纓集』이 있으며, 「회로당기會老堂記」·「속두류록續頭流錄」 등 26편이 『속동문선續東文選』에 수록되어 있다. 자계서원紫溪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¹
출처 : 문화유산답사 - 함양청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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