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재고택에서
김 익 택
꽃이 피어도
자랑하지 않고
열매 맺어도
제잇속 챙기지 않아
삶이 부끄럽지 않은
그 분
평생
학문 아니면
욕심 부리지 않아
내것 이어도
내 맘대로 하지 않고
정신과 양심까지
나누고 배풀어
부와 앎
욕심 욕망
만연한
물질만능시대일수록
고결한 삶
후세 사람들
가슴에
시대의 귀감되어
꽃으로 피어나고
씨앗으로 남으리
윤증 명재선생은
명재선생은
팔순이 넘도록 초가에서 살았다.
현재 명재고택은
그의 제자들이 십시일반 모금해서 60칸 한옥 기와집을 지어
살도록 했지만 선생은 과분하다며 살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돌아가시기 5년전,
그러니까
명제고택이지만 명제선생은 살지 않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벼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의정을 하사 받았지만
평생 초야에서 살았다고 한다.
論山明齋古宅 | |
영어의미역 | Nonsan Myeongjae Old House |
---|---|
이칭/별칭 | 윤증 선생 고택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노성산성길 50]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회정 |
논산 명재 고택은 논산시청에서 약 6㎞ 북쪽 지점의 노성면사무소 인근 교촌리 노성산 남쪽 기슭에 노성향교, 노성 궐리사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논산 명재 고택은 조선 후기 숙종 대에 건립되어 후대에 수리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안채와 사랑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멸실되었던 사당은 1983년 복원하였으며, 수 차례에 걸쳐 안채·사랑채 및 담장·석축·연지 등을 보수,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4년 문화재 지정 당시 윤증 선생 고택이라 하였으나 2007년 1월 윤증 선생의 호를 따라 논산 명재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논산 명재 고택은 이산(尼山)이라고도 불리는 노성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산 줄기의 남사면을 배경으로 남향으로 자리 잡았으며, 집 전체의 평면 구성 형태는 ‘ㄷ’자의 안채와 ‘一’의 사랑채가 조합을 이룬 ‘ㅁ’자형 집으로, 사당은 가옥의 뒤편 동쪽의 경사지에 복원하여 별도의 공간으로 배치하였다. 사랑의 앞면에는 넓은 마당을 두었으며, 마당의 왼쪽으로 우물과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사당은 멸실되었던 것을 1983년 도비와 시·군비를 보조받아 복원한 것으로, 정면 3칸의 전퇴를 둔 맞배지붕 건물이다. 논산 명재 고택의 가장 높은 위치에는 신문을 두고,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으로 조영하였다. 안채는 높지 않은 기단 위에 1고주 5량가 구조로 사랑채와 거의 같은 양식이다.
북쪽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대청을 두었고, 뒤편 좌우에 각각 고방(庫房)을 두었으며, 고방 앞면에 쌍여닫이 띠살문을 두었다. 대청의 서쪽으로 2칸의 안방과 1칸의 윗방을 두었으며, 그 남쪽으로 넓은 공간의 부엌을 두었다. 부엌의 상부에는 다락을 설치하였다. 대청의 동쪽에는 안방보다 작은 면적의 건넌방을 2칸 두었으며, 그 뒤편으로 윗방을 1칸 두었다. 또한 건넌방 남쪽으로 1칸 반의 다락이 있는 부엌을 두었다.
안채의 남쪽에 위치한 대문채는 2칸의 중문칸과 서편의 행랑방 1칸, 동편에는 광으로 사용되고 있는 2칸의 방으로 구성되어 사랑채와 ‘ㄱ’자로 연결된다. 대문이 별도로 없는 집의 구조상 중문을 대문으로 겸하되, 대문이 열렸을 경우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자벽을 두어 외부 시선을 차단하는 완충 장치로 활용하였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오른쪽 앞뒤 2칸에 대청을 두었고, 왼쪽 앞뒤 2칸에 누마루를 두었으며, 중앙에는 2×2칸 규모의 온돌방을 만들었으나 앞면은 반 칸을 안으로 들여 툇마루를 두었다. 온돌방 뒤에 반 칸의 고방(庫房)이 있으며, 누마루 후면으로는 1×2칸의 방이 꾸며져 있어, 대문 옆의 행랑채와 ‘ㄱ’자형으로 연결되고 있다. 가구 구조는 공포(栱包)가 없는 민도리로, 퇴고주를 세워 퇴량(退梁)과 대들보를 걸었으며, 종량 위에 있는 제형 대공에서는 뜬창방을 볼 수 있다.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형상화한 방지의 형식으로 내부에 원형의 섬을 조영하였다. 사랑채의 오른쪽으로는 현재 윤증 집안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장류를 상품화하여 지역 특산물로 양산하기 위한 장독대들이 들어서 있다.
2011년 현재 논산 명재 고택에서는 방문하는 이들을 위해 사랑에서 전통 가옥 숙박 체험이 가능하도록 일반에 공개하고 있으며, 웹사이트를 구축하여 논산 명재 고택의 다양한 정보를 일반에 알리고 있다.
형산 정경연교수의 풍수지리 해석
충청도 양반집으로 유명한 명재고택은 충남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에 위치하고 있다. 논산은 육군훈련소가 있어 병영 도시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학문의 고장으로 기호학파의 중심지였다. 흔히 ‘충청도 양반’이란 말은 논산 때문에 생겼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주변에는 노성향교와 공자의 영정을 모신 권리사가 있어 조선 유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교촌이라는 지명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파평윤씨가 노성면 일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입향조인 윤돈이다. 선조 때 공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의 책임 하에 조성된 선조의 능이 장마에 무너지는 일이 생겨났다. 그 책임을 지고 낙향한 그는 지금의 이구산 서쪽 자락에 터를 잡았다. 이후 가문이 융성하기 시작하였다. 아들 윤창세는 이조판서, 손자 윤황은 대사간으로 우계 성혼의 사위가 되었다. 증손 윤문거·윤선거·윤순거 등이 이름을 날렸으며, 고손 윤증은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이곳의 태조산은 금남정맥의 계룡산(846.6m)이다. 계룡산 수정봉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산맥 하나가 안골산(321.8m)을 만들고, 여기서 다시 남쪽으로 길게 내려와 주산인 노성산(349m)을 세웠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노성현 북쪽 5리 거리에 노산(魯山)이 있는데, 현의 진산으로 성산(城산)이라고도 한다.”라고 적고 있다. 오늘날은 노산과 성산을 합쳐 노성산(魯城山)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노는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와 관련하여 이름 지은 것으로 해석한다.
노성산에서 나온 맥은 옥제봉과 옥리봉을 거치며 단아한 봉우리를 만드는데 정상이 둥근 반원형이다. 이러한 모양을 오행으로는 금성체, 구성으로는 무곡성, 형국으로는 옥녀봉이라고 부른다. 집 앞에서 옥녀봉을 바라보면 반원형의 산들이 3~4개로 겹쳐 보인다. 이는 공자가 태어난 중국 산동성 곡부의 니구산(尼丘山)과 비슷하다. 곡부의 니구산(340m)은 다섯 개의 반원형 봉우리가 연이어 있는데 이곳보다 산세가 크고 암석이 많다. 공자를 닮고자 했던 조선의 선비들이다. 당연이 이곳 옥녀봉도 니구산이라 불렀다, 그런데 공자의 이름이 구(丘)다. 태어났을 때 머리가 니구산을 닮아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조선 선비 입장에서 공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불경스러운 일이다. 니구산에서 구자를 빼고 니산(尼山)으로 부르기도 한다. 노성면의 옛 이름이 니산현, 니성현이었던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옥녀봉 중심에서 나온 맥은 반원형의 봉우리들을 만들며 아래로 내려온다. 봉우리와 봉우리 간격이 가깝기 때문에 맥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이를 월사맥이라고 한다. 월사맥이 고택 가까이 이르러서는 세 개로 갈라진다. 좌측 맥은 청룡이 되어 팔을 안 듯 원을 그리며 고택 입구의 느티나무가 서있는 곳까지 이어진다. 우측 맥은 향교 쪽으로 이어져 이곳의 백호 역할을 한다. 백호에 비해서 청룡의 길이가 길지만 높이는 약간 낮다. 이를 비보해주기 위해 수령 4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청룡 능선에 여러 개 서 있다. 동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므로 집의 생기를 보호한다. 가운데 중심맥은 두 개로 갈라져 하나는 안채로 다른 하나는 사랑채로 이어진다. 안채와 사랑채가 모두 혈처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고택 뒤 담장 밖으로 나가면 작은 물길이 양 갈래로 갈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이 뒤에서 갈라지는 것을 상분(上分)이라고 한다. 뒤에서 갈라진 물이 양쪽으로 감싸고 흘러 앞에서는 합수해야 한다. 이를 하합(下合)이라 한다. 이곳의 합수처는 집 앞에 있는 샘물이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항시 용출하고 있는 진응수다. 양택은 음택에 비해 자연지형 훼손이 심하다. 특히 맥과 정확한 혈처를 찾기가 쉽지 않다. 이때는 물의 상분하합이 이루어지는지를 살피고 그 안쪽에 혈이 있다고 판단하면 된다. 이곳은 물의 상분하합이 여러 번에 걸쳐 일어나는데 앞에서 합수하는 물들이 모여 연못을 형성하였다. 이를 지당수라고 하는데 부를 의미한다.
명재고택의 형국은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다. 거문고는 앞에 보이는 야트막한 안산으로 한일자 모양으로 생겼다. 옥녀는 용모가 준수하고 귀한 자손 배출을 뜻하고 탄금은 학문과 기예가 높고 뛰어남을 의미한다. 안산너머로 보이는 뭉게뭉게 모이는 조산들은 옥녀의 거문고 소리를 듣기 위한 청중들이다. 이곳 고택으로 사람이 끊이지 않고 모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형산 정경연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