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통
김익택
채워도 2%가 부족한 것 같고
채워도 8%가 더 아쉬운 것이 삶인가
만족의 주머니는
화색이 도는 날이 없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가슴엔
울화(鬱火)통만 있을뿐
바쁘게 살아도 가진 것도 없다
그럴 때 나는 썩어도 비우지 못하는
군자가 사용하지 않는 먹통 같고
엄동설한 발가벗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같다
삶도 한잔의 맥주처럼
김익택
맥주는 유리잔에서 한바탕 소동을 쳐야 제 맛이 난다
병 주둥이를 떠나자 마자 개 거품을 물어야 눈들이 웃고
입들이 좋아한다
차가운 비린 맛이 대롱 같은 목 줄대에 느끼는 짜릿함이 있어야
하루의 찌든 때 목구멍에서 잊는다
남자 입이든 여자 입이든 가리지 않고
똑 같은 맛과 향으로
얼마나 그 속을 채워야 할지 모르지만
취하면
척척 알아서 기분 풀어주는 즐거운 원숭이가 되었다가
신나는 돼지가 되었다가 무서운 줄 모르는 사자가 되었다가
마침내 술의 잉여의 몸이 된다
눈 맞으면
순간에 죽어도 후회 없는 쾌락도 되었다가
만나면 으르렁거리는 늑대의 소굴에서도 눈 풀리는
속을 녹이는 내복약도 되었다가
마음과 마음 이어주는 보약보다 좋은 윤활유가 되었다가
평생 머리 수그리고 사는 의욕상실 일순간 폭발하는 기폭제가 되는
순간순간 보약 되는 萬病通治다
입술의 진리
김익택
좋아하는 것끼리
최상의 예의는 반듯한 의식주의이고
최상의 관심은
사랑의 표명 입술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가 그렇고
사랑하는 사람과 키스가 그렇다
싫은 것끼리
최악의 예의는 모함이고
최악의 관심은
죽음의 표명도 파란 입술이다
극과 극은 같은
입술에서 삶과 죽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먹이 다툼이 그렇고 생존경쟁이 그렇다
두 갈래 길 극복하는 길은
선자의 말씀이고 종교의 가리킴이다
생존 기술의 본능
김익택
삶을 품고 생명을 품은
산은 단 한번도
대가를 바라거나 자만하지 않는다
그 산에 나무와 숲들은
제가 떨어뜨린 낙엽을
양식 삼고
흐르는 물 끌어 모아 잎 피워
스스로 튼튼한 재목이 된다
물수리는 하늘을 날지만
먹이는 물속에서 찾는다
몰총새는 물속에서 살지만
물 밖 곤충을 먹고 산다
이렇듯 이 땅의 삶들은
제각기 다른
생존의 기술이 있다
뭉크의 절규를 보면서
김익택
공포가 전율하는 뭉크의 그림은
내 안의 양심
내 안의 잘 못을 묻는 질문이다
무엇을 보고 저렇게 놀라고 있는 것인지
노을 속에 파묻혀가는
혹은 노을 속에 매몰되어 가는 표정
진실이 거짓에 현혹되어
공포에 휩쓸린 것인지
거짓이 진실에게
심판을 받는 것인지 모를
그림 속에 공포 비명소리 들리지 않지만
목을 찢고 흘러나오는
비명소리보다 섬뜩하다
인간이 저지른 죄악 인간이 받을 고통
악의 죽음에 직면한 영혼의 모습인가
그림을 보고 있는
동안뇌리에 떠나지 않는 공포가
올 곧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연거푸 펌프질을 하고 있다
문득 떠오르는 진리의 한 조각
김익택
바이올린 음률
천상의 소리 낼 수도 있고
공포의 소리 낼 수도 있다
내 목소리 네 목소리
뭇 사람에게 기억되는 것은
존재 책임 때문일 것이다
먹구름을 쫓아 달려가는
아프리카 세링게티초원의 루때처럼
눈바람 속으로 달려가는
몽골초원 소떼처럼
목숨을 걸고 달려가는 것은
살려는 생명의 본능 때문일 것이다
나이테
김익택
세상이 둥글다는 사실
누가 모를까 봐 저렇게 심장에
겹겹이 시간을 새겨 놓았을까
네가 새겨 놓은 가느다란
선 하나하나
인고의 탯줄은 세월의 기록
좋아도 돌고 아파도 돌고
살기 어려울 땐 움츠리고
살기 편할 때 활짝 펼친 흔적
거미줄같이 고스란히 새겨 놓았다
온갖 곤충이 너를 해체하기 전
돌고 도는 진리
시간의 역사를 새겨 놓았다
너도 나도 시간의 손님
김익택
그때는 너도 나도 새벽 손님이었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다시는 죽지 않는 불사조처럼
너도 나도 청춘
중국집 조리실 프라이팬 불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은
삶의 숙제를 던져주었고
그 숙제를 풀기 위해
너도 나도
강물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거친 물살과 가파른 폭포를 튀어 오르려고
몸부림치다 보니 젊음은 가고
지금은 너도 나도 황혼 손님이 되었습니다
소리의 진실
김익택
질주 본능이 있는 차량은 감정이 없다
비명횡사 시킬 것 같이
긴 박한 소리는
아까운 것 없고 아낄 것 없다
장해와 장애
장소와 위치를 가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쏟아낸다
그 소리의 진실은 언제나 직선적이다
주인을 가리지 않고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삶을 구분하지 않는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무자비하지는 않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이자 매개체
차량 소리의 본능은 사나운 것은 더 사납게
부드러운 것은 더 부드럽게
사용하는 사람 그릇에 따라
인위적 통제에도 호응하는 소리다
양면의 칼날 같이
두레박이 사는 법
김익택
머리가 부딪혀 물 파편이 사방에 튀고
좌충우돌 파열음이 검은 울림통에 요동치며
곤두박질 쳐야 사는 삶이 있다
부드러운 여인 손끝을 벗어나는 순간
대문 앞에서 사정없이 쫓겨나는
거지꼴도 그런 거지 꼴이 없는
황천길을 가듯 벼락처럼 내리 꽂혀
돌아올 때 온 가슴에 가득 찬 생명
모자랄 것 없는 눈물 흘리며 올라오는
삶이 있다
세상의 제일 시원스런 소리는
여름 한낮 목마른 사람
목 젖을 훑고 내려가는 물소리
파닥거리는 삶은
모두 살아 있다는 증거다
일년 356일
주물의 불꽃처럼 튀어야 삶을 산다
동굴 속에 한줄기 빛이 찬란하듯
하루하루
깊고 어두운 곳에서 희망을 길어 올리는
추상 같은 삶이다
'조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위풍당당 진도개 (0) | 2024.05.19 |
---|---|
독수리의 비행 (0) | 2024.05.19 |
까마귀 그리고 관찰 (1) | 2024.04.21 |
흰꼬리수리의 까마귀 추격 (0) | 2024.04.05 |
똥개와 독수리 (1) | 2024.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