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몰 집
김 익 택
1
한 백 년이 지나는 동안
소리 없이 낡은 그 집
부엌 천정에
할머니의 할머니가 지핀 군불 검댕이가
서까래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2
저기 사랑 체
돌 담 너머
골목에서 마주쳤던
그 아가씨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남의 집에서 고향 집을 찾고
남의 마을에서 추억을 찾는 사람 눈길이 깊다
3
실 향민 아닌
실 향민이 된 노인은
고향 뒷산 언덕에 앉아서
낚시를 드리운 채
잔 물결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4
저기 은빛 물결 속
물고기가 안방을 드나드는 고향 집
귀신도 들어 갈 수 없는
깊고 차가운 물속 고향 집을 그는
생전에 늙은 어머니를 보고 있듯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5
모로 누운 바람 한줄기기가
하얗게 쉰 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고
하늘로 날 수 없는 산 그림자는
운무와 함께
고향 집 물속으로 침전하고 있다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김 익 택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내가 나에게 묻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얼굴을 요모조모 자꾸 뜯어다 보면
엉뚱하게 내가 사람같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더 자세히 뜯어 보면
눈은 커서 주위가 어두워서 슬프고
콧 등은 뾰족하고 왼쪽으로 조금 휘어져서 신경질적이다
넓은 귀는 어딘가 어설프고
입술은 얇고 짧아서 섧다
그리고 보니 나는 미어켓을 닮았다
자나 깨나 먹을 때나 잠잘 때나
항상 조바심에 떨고 있는 가여운 미어켓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에도
어딘가 동물을 꼭 닮은 곳이 있다
어떤 사람 얼굴은 긴 콧등이 영양을 닮았고
어떤 사람 얼굴은 큰 눈매가 사슴을 닮았고
어떤 사람 얼굴은 넓은 입이 돼지를 닮았고
어떤 사람 얼굴은 눈 주위가 사자를 닮았고
어떤 사람 얼굴은 뾰족한 입이 쥐를 닮았다
그렇다면 전생은 동물이었을까
왜
무슨 업으로
남의 돈을 빼앗거나
남의 물건을 도둑질을 하였거나
사람을 죽였거나
아니다
그랬다면 사람으로 태어날 수가 없지
부정에 부정은 긍정이듯
생각은 결국 원위치 돌아오지만
나도 내가 행동과 성격이 궁금할 할 때가 있다
나도 몰래 나를 의심할 때가 있다
긴 시간
김 익 택
그대가 하는 말
내 귀에서 가슴으로
완전히 소화되어 숙성되는 시간
0.5초
그대 내 곁에 있어도
내가 말 할 수 있는 시간은
광속 어둠의 거리
좋아서 두려운 시간은
떨림과 벌렁거리는 시간이었고
설레서 짧은 시간은
가슴 떨리는 시간이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머뭇거린 시간은
내가 나를 의심하는 시간이었고
하고 싶은 말 많아도 떨어지지 않는 입은
답답한 긴 시간이었다
겨울 갈대의 화장법
김 익 택
갈대는 단 한번도 부드러운 붓으로
제 얼굴에 분 터치를 하지 못했다
톡톡 치며 문지르고
살살 문지르다 톡톡 치고
고운 볼엔 부드럽게 눈썹은 더욱 짙게
밝은 곳은 어둡게 어두운 곳은 밝게
가느다란 코 능선 따라 달라지는 연한 홍색
갈대는 바람 손을 빌려
달과 태양 볼에 화장해도
지나가는 바람에 매번 제 얼굴을 씻을 줄만 알았지
제 얼굴에 화장은 단 한번도 하지 못했다
달팽이의 외출
김 익 택
비 오고 습기 가득 찬 날
달팽이가 흰 고무신을 신고 외출한다
물기 먹은 풀 줄기 길을 삼아
비 소리 바람 소리 천둥소리를 따라
하늘 여행 떠난다
고독한 이파리가 끝없이 나부끼고
청춘의 나무들이 온 몸을 떨고 있는
어두운 밤에 홀로
죽음도 두렵지 않는 여행길을 떠난다
비 그치고 바람 멎고
해 밝은 아침
태양이 떠 오르면
따사로운 햇살이 살을 태우고
마른 바람 한줄기는
껍데기만 남겨두고
영혼까지 훔쳐가는 여행길 떠난다
X
김 익 택
불안전 하지만
너와 내가 만나면
배가 되는
X
셀 수 없고 알 수 없는
상수가 되었다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하학적으로 늘어나는
복리 이자가 되었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의구심의 원흉이 되기도 하지
하지만 마음 풀고
X
양쪽 끝에
선하나 이어주면
한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
예리하게 날이 선 마음을 춤추게 하지
11월 민들레
김 익 택
추위가 드센 11월 말
양지 쪽 보도 블록 사이로
민들레 한 송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눈 돌려도
화원의 온실 아니면 볼 수 없는
귀한 풀인데도
어느 누구 한 사람 눈길 주는 않는다
줏대 없는 낙엽
이지 저리 휘 날리다 구석에 모여
바람 눈치 살피고 있고
몸을 움츠린 사람들은
제 발만 바라보며 종종 걸음 치고 있다
누군들 비켜 갈 수 없는 계절은
제 갈길 가는 나그네
연민의 정은 가당치 않다
자연에게 생명은
시기와 때를 놓치면 가혹한 형벌
눈길은 있어도 도움은 없다
살고 죽은 것은 자신 스스로의 몫
누구 책임도 아니다
가슴 따뜻한 사람과
눈길 마주쳤다 하여도
거기 잠시 마음만 두고 갈 뿐
결코 생명 은인 아니다
무심한 사람들 구두에 밟혀 죽을 지
아니면 영하의 날씨에
언제 얼어 죽을 지 모르는
양지 쪽 보도 블록 사이로 고개 내 밀고 있다
땀 구멍도 훤히 보이는
42인치 평면 TV에
인도 빈 민촌 아이들
아프리카 난민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이
개밥 그릇보다 못한 그릇을 들고
낯선 외국인들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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