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읍성
김 익 택
오월 신록이
푸른 도포로 갈아 입은
남산 그 아래 청도읍성
나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려는
양민의 소박한 꿈같이
단아하다
가고 없는 옛이야기
잊어버린 기억같이
켜켜히 쌓인 돌성은
입을 꾹 다물었고
구릉지에 핀
작약 붉은 꽃은
조총 앞에서
칼 들고 싸우다 죽은
젊은 군인 화신같이
청순하고 맑은
새 색시
치마폭에 모란
그림같이 아름답다
한자 | 淸道邑城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
집필자 | 김찬영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에 있는 조선 시대 읍성.
청도읍성은 고려 말에 토성으로 초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으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선조 24)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국 읍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크게 수축했다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큰 폐해를 입었고, 그 이후 성벽 및 성문 등의 시설이 건립과 소실을 반복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현재 전체 둘레 대략 1.8㎞, 면적은 약 20만 1090㎡가 확인된다. 동쪽 성벽 일부만 1995년 1월 14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청 서쪽에 위치한 화양읍 내의 동상리와 서상리 일원에 위치한다. 주변에 하양읍사무소, 청도 향교 등이 있다. 청도 IC에서 청도 방면으로 진행하여 모강 사거리로 우회전하면 모계 고등학교 뒤편을 지나 국도 20호선과의 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국도 20호선을 따라 각남면으로 진행하면 화양 삼거리에 이르는데, 여기서 좌회전 동상리 방면으로 진행하면 화양읍사무소 이르기 전에 청도읍성이 보인다. 청도읍성 입구 좌측에는 주차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청도읍성은 조선 초기에 이미 석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1589년(선조 22)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알리자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대로변에 접한 주군(州郡)의 성지(城池)를 수축하라는 왕명에 따라 1590년(선조 23)에 군수 이은휘(李殷輝)가 2년에 걸쳐 개축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뒤 1669년(현종 9)에 군수 유비(兪秘)가 서문인 무회루를 건립했고, 동문인 봉일루는 1708년(숙종 34)에 군수 임정(林淨)이 건립했다. 한편 1870년에 군수 김이교(金履橋)가 남문인 진남루을 건립함으로써 4성문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청도읍성의 규모는 둘레 1,880m[1,570보], 높이 1.7m[5척 5촌], 성첩 600첩이라 기록되어 있다.
1920년경 일제가 성내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성문과 성벽을 헐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화강지 축조 시에 성돌을 제방 축조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로써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05년 정밀 지표 조사 및 복수[복원] 정비 계획안 수립을 거쳐 2006년부터 연차적으로 동문지, 북쪽 성벽 일부 및 북문지 등의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 정비되었다. 2010년에 북쪽 성벽 치성과 성내지, 남문지 등의 발굴 조사를 하고, 북쪽 성벽 일부 구간을 복원 정비 중에 있다.
청도읍성은 청도의 진산(鎭山)인 남산[829m]에서 청도천으로 뻗은 두 줄기의 능선 사이에 남고북저(南高北低), 동고서저(東高西低)한 해발 100∼122m의 구릉지와 일부 평탄지에 축조된 전형적인 평산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전방으로는 비슬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청도천과 양안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평면 형태는 동서간 직선거리 약 930m, 남북간 직선거리 약 870m로 장방형이다.
성벽은 화양읍 주변의 개천과 산에서 채집한 돌로 축조했다. 축조 수법은 바닥에 잔자갈의 기초를 깔고 그 위에 납작한 지대석을 1단 놓은 뒤 성돌을 올렸다. 성돌은 지대석보다 안쪽으로 약 20㎝ 가량 안으로 들려 아랫단부터 윗단으로 가면서 작은 크기의 성돌을 거의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체성은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교대로 허튼층쌓기를 했고, 쌓기 중간에는 쇄기돌을 박아 구조성을 높였다. 체성 내부는 흙 없이 돌로만 내부를 채웠다. 잔존 상단 너비는 4∼5m, 내단은 완만한 경사의 법면으로 처리한 듯하다. 적대와 치성은 체성 축조와 동시에 축조했고, 축조 세부 기법은 체성과 동일하다.
2012년 현재 동쪽 성벽 일부만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1995년 1월 14일]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그 외 성벽 구간은 민가 및 경작지 등으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어 간헐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2009년부터 매년 청도읍성 동문에서 북문까지 복원되어 244m 구간에서 한 줄로 청도읍성 밟기를 진행하고 있다.
성 안팎으로는 당시 지방 행정 시설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 청도 동헌[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03호], 도주관[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 청도 향교[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 청도 척화비[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09호] 등 당시 지방 행정 및 지역사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학술 조사 결과, 청도읍성은 성벽·치성·적대·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청도읍성은 임진왜란 직전에 지방 행정 및 군사적 목적으로 기존 토축성을 석축성으로 수축한 성이다. 수많은 읍성이 근대화 및 도시화로 인해 거의 사라진 상태이나, 다행히 성벽 및 주요 시설이 잘 남아 있어 조선 후기 군사 시설로서의 읍성 구조와 형태를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객사, 동헌, 청도 향교, 석빙고, 척화비 등이 잘 남아 있어, 당시 지방 행정 시설의 배치와 구조를 가늠할 학술 자료로도 가치가 높다
청도읍성은 고려 말에 토성으로 초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으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591년(선조 24)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전국 읍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크게 수축했다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큰 폐해를 입었고, 그 이후 성벽 및 성문 등의 시설이 건립과 소실을 반복해 오다가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었다. 현재 전체 둘레 대략 1.8㎞, 면적은 약 20만 1090㎡가 확인된다. 동쪽 성벽 일부만 1995년 1월 14일에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청 서쪽에 위치한 화양읍 내의 동상리와 서상리 일원에 위치한다. 주변에 하양읍사무소, 청도 향교 등이 있다. 청도 IC에서 청도 방면으로 진행하여 모강 사거리로 우회전하면 모계 고등학교 뒤편을 지나 국도 20호선과의 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국도 20호선을 따라 각남면으로 진행하면 화양 삼거리에 이르는데, 여기서 좌회전 동상리 방면으로 진행하면 화양읍사무소 이르기 전에 청도읍성이 보인다. 청도읍성 입구 좌측에는 주차장 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청도읍성은 조선 초기에 이미 석성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으로는 1589년(선조 22)에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정세의 위급함을 조정에 알리자 동래에서 서울에 이르는 대로변에 접한 주군(州郡)의 성지(城池)를 수축하라는 왕명에 따라 1590년(선조 23)에 군수 이은휘(李殷輝)가 2년에 걸쳐 개축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건물이 소실되었다. 그 뒤 1669년(현종 9)에 군수 유비(兪秘)가 서문인 무회루를 건립했고, 동문인 봉일루는 1708년(숙종 34)에 군수 임정(林淨)이 건립했다. 한편 1870년에 군수 김이교(金履橋)가 남문인 진남루을 건립함으로써 4성문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청도읍성의 규모는 둘레 1,880m[1,570보], 높이 1.7m[5척 5촌], 성첩 600첩이라 기록되어 있다.
1920년경 일제가 성내 신작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성문과 성벽을 헐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화강지 축조 시에 성돌을 제방 축조에 사용했다고 한다. 이로써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2005년 정밀 지표 조사 및 복수[복원] 정비 계획안 수립을 거쳐 2006년부터 연차적으로 동문지, 북쪽 성벽 일부 및 북문지 등의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 정비되었다. 2010년에 북쪽 성벽 치성과 성내지, 남문지 등의 발굴 조사를 하고, 북쪽 성벽 일부 구간을 복원 정비 중에 있다.
청도읍성은 청도의 진산(鎭山)인 남산[829m]에서 청도천으로 뻗은 두 줄기의 능선 사이에 남고북저(南高北低), 동고서저(東高西低)한 해발 100∼122m의 구릉지와 일부 평탄지에 축조된 전형적인 평산성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전방으로는 비슬산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청도천과 양안으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평면 형태는 동서간 직선거리 약 930m, 남북간 직선거리 약 870m로 장방형이다.
성벽은 화양읍 주변의 개천과 산에서 채집한 돌로 축조했다. 축조 수법은 바닥에 잔자갈의 기초를 깔고 그 위에 납작한 지대석을 1단 놓은 뒤 성돌을 올렸다. 성돌은 지대석보다 안쪽으로 약 20㎝ 가량 안으로 들려 아랫단부터 윗단으로 가면서 작은 크기의 성돌을 거의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체성은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교대로 허튼층쌓기를 했고, 쌓기 중간에는 쇄기돌을 박아 구조성을 높였다. 체성 내부는 흙 없이 돌로만 내부를 채웠다. 잔존 상단 너비는 4∼5m, 내단은 완만한 경사의 법면으로 처리한 듯하다. 적대와 치성은 체성 축조와 동시에 축조했고, 축조 세부 기법은 체성과 동일하다.
2012년 현재 동쪽 성벽 일부만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1995년 1월 14일]로 지정되어 보존·관리되고 있다. 그 외 성벽 구간은 민가 및 경작지 등으로 인해 대부분 훼손되어 간헐적으로 성벽이 남아 있다. 2009년부터 매년 청도읍성 동문에서 북문까지 복원되어 244m 구간에서 한 줄로 청도읍성 밟기를 진행하고 있다.
성 안팎으로는 당시 지방 행정 시설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 청도 동헌[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403호], 도주관[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 청도 향교[경상북도 유형 문화재 제207호], 청도 척화비[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09호] 등 당시 지방 행정 및 지역사 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학술 조사 결과, 청도읍성은 성벽·치성·적대·문지 등이 확인되었다.
청도읍성은 임진왜란 직전에 지방 행정 및 군사적 목적으로 기존 토축성을 석축성으로 수축한 성이다. 수많은 읍성이 근대화 및 도시화로 인해 거의 사라진 상태이나, 다행히 성벽 및 주요 시설이 잘 남아 있어 조선 후기 군사 시설로서의 읍성 구조와 형태를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객사, 동헌, 청도 향교, 석빙고, 척화비 등이 잘 남아 있어, 당시 지방 행정 시설의 배치와 구조를 가늠할 학술 자료로도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