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출지 여름풍경
김 익 택
해마다 여름 오면
서출지에 피는
분홍연과
목백일홍은
그 옛날 노인
화신일까
작은 못 서출지는
그 옛날 농부
고봉 밥처럼
분홍 연꽃이
소복이 피어나고
이요당에 떨어진
목백일홍 붉은 꽃은
그 옛날 공주 얼굴에
눈물 자국같이 얼룩져 있다
백일홍이 뚝뚝
김 익 택
백일홍이
뚝뚝
눈물을 흘린다
제 꽃잎 떨어진
그 자리에
한때 화려함은
불볕 더위같이
활활 타올라
지칠 줄 몰랐으나
사정 없이 후려치는
비바람 앞에
어쩔 수 없는 일
삶의 몰락 아니라
청춘은 한때라는 사실
자연이 잠깐
일깨워 준 것이지
서출지
경주 서출지(慶州 書出池)는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연못이다. 대한민국의 사적 제13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 소지왕 때, 이 못 근처에서 왕비의 비행(非行)을 알리는 글 발이 전해졌다는 고사가 있다. 1964년 7월 1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38호 서출지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경주 서출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개요[편집]
경주 남산 기슭에 위치한 삼국시대 연못이다.
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하니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 가보게 하였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던 중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나타나 봉투를 건네줘 왕에게 그것을 올렸다. 왕은 봉투 속에 있는 내용에 따라 궁에 돌아와 화살로 거문고 집을 쏘게 하니,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중과 궁주가 흉계를 꾸미고 있다가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못에서 글이 나와 계략을 막았다 하여 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하고, 정월 보름날은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준비해 까마귀에게 제사 지내는 풍속이 생겨났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임적이라는 사람이 못가에 건물을 지어 글을 읽고 경치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 이 건물은 연못 서 북쪽에 소박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신라 21대 소지왕이 서기 488년 정월 보름 날 행차에 나설 때다.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말했다.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십시오" 왕은 장수를 시켜 따라가게 했다. 동남산 양피촌 못가에 이르러 장수는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이때 갑자기 못 가운데서 풀옷을 입은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장수께서는 이 글을 왕에게 전하시오" 노인은 글이 써진 봉투를 건넨 뒤 물 속으로 사라졌다. 왕이 봉투를 받아보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라고 적혀있었다. 이를 본 신하가 말했다. "두 사람은 평민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킴이오니 열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왕은 신하의 조언에 따라 봉투를 뜯었다.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 갑을 쏘아라' 라고 적혀 있었다. 대궐로 간 왕은 왕비의 침실에 세워둔 거문고 갑을 향해 활 시위를 당겼다. 거문고갑 속에는 왕실에서 불공을 보살피는 승려가 죽어있었다. 승려는 왕비와 짜고 소지왕을 해치려한 것이었다. 왕비는 곧 사형 되었으며 왕은 노인이 건네준 봉투 덕분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 연못은 글이 적힌 봉투가 나온 곳이라 해서 서출지라 부른다. 소지왕 10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40년 전이다. 신라 눌지왕 시대에 묵호자가 불교를 전하러 왔으나 펴지 못했다. 소지왕 시대 아도 스님 역시 불교 전파에 실패했다. 법흥왕 15년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이다. 당시 신라 귀족들은 민속신앙 특히 조상을 섬기는 신앙이 강해 쉽게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출지의 전설은 전통적 민속신앙속에 새로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