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낙동강가 민씨 오우정(五友亭) 안에 있는 서원으로 연산군, 중종 때 학자인 민구령(閔九齡), 민구소(閔九韶), 민구연(閔九淵), 민구주(閔九疇), 민구서(閔九敍) 등 5형제를 배향하였다. 삼강서원은 조선 연산군·중종 때의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였던 민구령(閔九齡)이 1510년(중종 5)경에 삼랑루(三郞樓)가 있던 자리에 정자 하나를 짓고, 아우인 민구소(閔九韶), 민구연(閔九淵), 민구주(閔九疇), 민구서(閔九敍)와 더불어 5형제가 베개를 나란히 하여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실천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출천(出天)하여 향도에 그 평판이 자자하였다. 1547년(명종 2)에 당시의 경상도 관찰사 임호신(任虎臣)이 그 명성을 듣고 이곳을 찾아와 사실을 확인한 다음 조정에 벼슬을 천거하는 한편 오우정(五友亭)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다. 그 뒤 1563년(명종 18)에 이곳 향중의 사림들이 민씨 5선생의 우애와 덕행을 추모하고 정자 안에 오우사(五友祠)를 지어 병향(幷享)하였으며 경내에 따로 기사비(紀事碑)를 세웠다. 후에 오우사는 삼강사(三江祠)로 바뀌었고 다시 삼강서원으로 승격하여 조두(俎豆)의 위의를 더욱 갖추었다. 정자와 사당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렸다가 그 뒤 자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었고, 이후 수백년동안 여러 차례 흥폐를 거듭해 오다가,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 1897년(고종 34)에 후손인 민영지(閔泳智), 민영하(閔泳夏) 등이 문중의 의논을 주도하여 사당에 있던 자리에 큰 집을 새로 짓고 오우정의 현판을 걸어 보존하였다. 1904년에 일부를 중건하였으며, 1979년에 14세손 민병태(閔丙兌)의 주선으로 후손들이 협력하여 정자의 규모를 확충하고 사당을 다시 지어 향중 유림들의 공의로 삼강서원의 현판을 걸고, 향사림의 주관으로 서원 향사를 받들고 있다.
| | | 1)주벽-민구령(閔九齡, 생몰연대미상) 자는 구원(龜元), 호는 욱재(勗齋), 본관은 여흥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김굉필, 정여창, 조위, 김일손 등 당대의 명유들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하였다. 다섯 형제의 우애가 돈독하여 그 부친이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하자, “옛날 군자는 8대를 같이 살아도 화목하게 지낸 일이 있는데 어찌 형제가 각각 재산을 나누어 떨어져 살며 내것, 네것을 가려라 하십니까?”하며 끝내 재산을 나누어 가지지 않고 평생을 서로 양보하고 절약근검하며 지냈다. 성종 20년(1490) 삼랑강 기슭 삼랑루 옛 터에 정자를 지어 오우정이라 편액하고 5형제가 동침하고 한 밥상에서 같이 먹었다. 명종 18년(1563) 고을 사람들이 이들의 우애를 기리기 위하여 오우사와 기사비를 건립하고 봄·가을에 제향을 받들었다. 조선 연산군·중종 때의 점필재(점畢齋『진외종조부(陳外從祖父))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仁), 중종 5년(1510년)경에 삼랑루(三郞樓)가 있던 자리에 정자 하나를 짖고, 아우인 경재(敬齋) 민구조(閔九詔), 우우정(友友亭) 민구연(閔九淵), 무명당(無名堂) 민구주(閔九疇), 삼매당(三梅堂) 민구서(閔九敍)와 더불어 5형제가 베개를 나란히 하여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실천하여 형제간의 우애가 출천(出天)하여 향도에 그 평판이 자자하였다. 다섯 형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님께서 심한 토사증상으로 빈사상태일때 5형제가 일제히 손가락을 끊어 수혈로 회생한 일이 있으며, 어머님께서 종기로 오래 고생하게 되자 5형제가 번갈아 농집을 빨아내어 완치하게 되었다.형제간의 우애 또한 돈독하여 아버지께서 각기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하자 "옛날 군자는 8대를 같이 살아도 화목하게 지낸 일도 있는데 어찌 형제가 각각 재산을 나누어 떨어져 살며, 내것 네것을 가려라 하십니까?" 하며 끝내 재산을 나누어 가지지 않고 평생을 서로 양보하고 절약근검하며 지냈다. 1490년(성종 20) 삼랑강 기슭 삼랑루(三浪樓) 옛터에 정자를 지어 오우정(五友亭)이라 편액하고 5형제가 동침하고 한밥상에서 같이 먹었다. 1563년(명종 18)에 고을 사람들이 이들의 우애를 기리기 위하여 오우사(五友祠)와 기사비(記事碑)를 건립하고 봄·가을에 제향을 받들었다. 1592년 임란때 문물이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1675년(숙종 원년) 오우정이 중건되고 임진하(任震夏)가 상량문을 지었고, 1697년(숙종 23) 오우사(五友祠) 중건 기초를 착공하였다. 1702년(숙종 28)에 향토 사림의 공의로 삼강서원(三江書院)에 입향하였고 1704(숙종 30)에 오우사 묘우(廟宇)를 중건하여 상량문(上樑文)은 신몽삼(辛夢參)이, 봉안문(奉安文)은 이명채(李命采)가 지었다.1753년(영조 29)에 여표비문을 대사헌 민우수(閔愚洙)가 짓고 1775년(영조 51)에 비를 세웠다. 1871년(고종 8)에 오우정을 서원 옛터에다 옮겨 세우고, 1874년(고종 11)에 오우선생실기(五友先生實記)를 간행하였다. 지금 밀양시 삼랑진읍 낙동에 오우정이 현존해 있으며, 매년 향토의 유림과 그의 후손들이 제향을 받들어 아름다운 삶의 한 증표로서 기리어 오고 있다. 2)민구소(閔九韶, 생몰연대 미상) 자는 성원(成遠), 호는 경재(敬齋)이다. 3)민구연(閔九淵, 생몰연대 미상) 자는 심원(深遠), 호는 우우정(友于亭)이다. 4)민구주(閔九疇, 생몰연대 미상) 자는 대원(大遠), 호는 무명당(無名堂)이다. 5)민구서(閔九敍, 생몰연대 미상) 자는 임원(任遠), 자는 삼매당(三梅堂)이다.
| | | 지금은 오우정만 남아 있으며 삼강서원의 현판을 걸었다.
| | | 1)오우선생실기책판(五友先生實記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5호(1995.05.02지정)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인이었던 민구령(閔九齡)이 그의 아우 구소(九韶), 구연(九淵), 구주(九疇), 구서(九敍)와 더불어 5형제가 베개를 나란히 기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실천하며 우애가 출천하여 향도에 그 평판이 자자하였던 오우선생의 시와 문적, 행적 등을 판각한 것이다. 2)삼강사비(三江祠碑)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6호(1995.05.02지정) 삼랑진 낙동강 가에 자리잡은 오우정(여흥 민씨 소유의 정자) 안에 놓여 있는 비로, 조선 연산군·중종 때의 학자인 민구령과 그의 네 아우의 효우와 덕을 추모하고 있다. 민구령(閔九齡)과 그의 아우 구조(九韶), 구연(九淵), 구주(九疇), 구서(九敍) 등 민씨 5형제의 효우와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오우정 경내에 건립한 기사비(紀事碑)이다.
| | | 참고-밀양문화원, ≪밀양지≫, 2006.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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