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봉사(舞鳳寺)에서

 

김 익 택

 

가파른 산비탈 절벽

한 마리 봉황이

세상을 바라보는

풍경이 이러할까

올라오면서 가졌던

근심과 수심은

잊어 버렸는가

잃어 버렸는가

내가

바람 되고 구름 되어

하늘을 날아 다니는 기분이다

 

 

1. 개요

密陽 舞鳳寺 石造如來坐像. 현 경상남도 밀양시 지역에 있는 사찰 무봉사(舞鳳寺)의 대웅전(大雄殿)에 봉안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불상. 현재 무봉사(경남 밀양시 영남루1길 16-11 (내일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493호로 지정되어 있다.

2. 내용

불상 높이 97㎝.

광배 높이 150㎝.

통일신라 시기에 조각된 화강암제 석조 불상으로, 원래는 영남사(嶺南寺)라는 절에 세워져있었던 것이나 지금은 그의 부속 암자였던 무봉사로 이동된 상태다. 현재 무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로 기능하고 있다.

현 영남루(嶺南樓) 자리에 있었던 사찰 영남사(嶺南寺)는 고신라시대에 창건되었던 절로, 773년(혜공왕 9)에 법조대사(法照大師, ?∼777)가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무봉사를 추가 건립한 것이다. 이후 천여년 가까이 밀양 지역의 대표 사찰 중 하나로 기능하던 중 고려 말기인 1359년(공민왕 8년) 화재로 영남사가 소실되었고, 이에 영남사를 복원하는 대신 부속 암자였던 무봉사를 승격, 화재 자리에 남아있던 본 불상 또한 무봉사로 옮겨놓은 것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불상은 목에 신라 특유의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얼굴의 풍만함과 길게 늘어진 두 는 잘 조화되어 존엄한 상호를 보이고 있다. 법의(法衣)는 통견의로서 그 옷무늬가 유려하고 가슴에 군의(裙衣)를 갖추었는데, 특히 왼쪽 어깨에 길게 늘어진 삼각형의 주름이나 양 팔뚝을 덮고 측면으로 둥글게 늘어진 주름, 무릎 좌우로 힘있게 펼쳐진 3단의 층단 주름 등은 예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이나 창원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등과 동일한 양식이다.

불상의 뒤를 조성하고 있는 광배의 경우 경북대학교 소장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335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등과 양식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특히 뒷면에 약사여래(藥師如來)를 조각하였는데, 이렇게 광배 뒷면에 불상을 새긴 예로는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慶州 南山 彌勒谷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136호), 남원 만복사지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호), 선산 궁기동 석불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등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에 제작된 한국의 석조 불상으로, 당시 신라의 석조공예술과 불교 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에 1969년 6월 24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 : 밀양 무봉사 석조여래좌상 (密陽 舞鳳寺 石造如來坐像)

신라 혜공왕 9년(733)에 법조가 영남사의 부속암자로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무봉사의 대웅전에 모셔진 높이 0.97m의 불상이다.

네모진 얼굴에 가는 눈과 입, 넓적한 코, 짧은 목 등이 다소 평판적으로 표현되기는 했으나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고 둥근 편으로 가슴이 다소 움츠러들어 보인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너무 두꺼워서 옷주름과 신체의 굴곡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2줄의 볼록한 선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고, 그 안에 덩굴무늬와 연꽃무늬를 새겨 넣었다. 광배의 바깥부분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광배의 앞면에 5구의 작은 부처를 새겼으며, 뒷면에는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는 약사여래를 조각하였다. 광배 뒷면에 불상이 새겨진 표현은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 제136호)과 같은 것으로 드문 예이다.

단정하고 양감있는 신체표현, 간략해진 옷주름, 화려하고 복잡해진 광배의 표현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출처-나무위키

무봉사(舞鳳寺)

불교유적

경상남도 밀양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법조가 창건한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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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773년(혜공왕 9)법조(法照)가 현재의 영남루 자리에 있었던 영남사(嶺南寺)를 순례하다가 큰 봉황새가 이곳으로 날아와 앉으므로, 상서로운 성지라 생각하고 창건하였다.

혹은 고려의 고승 범률국사가 이 절에서 하안거를 하면서 봉황이 춤추는 형국이기 때문에 절 이름을 무봉사로 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지금의 삼문동 지역에서 봉황이 알을 낳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밤나무를 심어 가려 주었으며, 무봉사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종소리를 울려 봉황을 날게 하였다고 한다.

1359년(공민왕 8)영남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무봉암이라 하였던 이 절을 무봉사로 승격시켰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05년혜징(慧澄)이 중건하고, 1628년(인조 6)경의(敬儀)가 중창하였다. 1899년(광무 3)경봉(慶蓬)이 중건하고, 1942년에 중수,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 삼성각·종루·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 안에는 1969년 보물로 지정된 무봉사 석조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참고문헌

『명산고찰(名山古刹) 따라』(이고운·박설산,신문출판사,1987)

『경상남도지(慶尙南道誌)』 하(下)(경상남도,1963)

집필자

집필 (1996년)

김위석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무봉사(舞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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