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양양군 북쪽 해안에 위치한 낙산사(洛山寺)는 오봉산(五峰山)을 배경으로 하여 신라 고승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계시를 받고 지은 절이다. 의상이 하루는 바닷가 동굴에 관음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몸소 친견을 하고자 이곳을 찾아왔다. 바닷가 바위 절벽 위에서 여러 날 기도한 의상애용으로부터 여의주를 받고 관음보살로부터 수정 염주를 받은 후 이를 안치한 곳이 낙산사다. 훗날 의상대사가 수도한 절벽 위에 정자를 세워 의상대(義湘臺)라 불렀고, 관음보살이 바다에서 붉은 연꽃을 타고 솟아오른 자리 옆에 절을 지어 홍련암(紅蓮庵)이라 했다. 이곳은 오늘날 우리나라 4대 관음성지(觀音聖地)로서 불교신도들이 많이 참배하고 있다. 참고로 4대관 음성지(觀音聖地)는 ①낙산사 홍련암 ②강화도 석모도 보문사 ③남해군(南海郡) 금산(金山) 보리암(普提庵) ③통천군 금란굴(金蘭窟)이다. 1977년에 오봉산 자락 신선봉 정상에 동양 최대 해수관음보살을 세웠다.
낙산(洛山) 주위의 경관을 다시 여덟곳으로 나누어 낙산팔경이 전해오고 있다.
낙산팔경은
① 낙산사의 저녁 종소리(洛迦暮鐘)
② 설악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雪岳返照)
③ 광석에서의 한밤중 다듬이 소리(廣石夜瞻)
④ 기동에서 피어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基洞暮煙)
⑤ 망월대 앞 동해 모래사장에 내려오는 기러기떼(平沙落雁)
⑥ 멀리 망월대 앞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遠浦歸帆)
⑦ 길게 뻗어내린 남대천의 물줄기(九萬長川)
⑧ 망월대에서 바라보는 가을달의 정취(望亭秋月)이다.
* 문화재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보물 제499호),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보물 제1723호), 양양 낙산사 일원(사적 제495호),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명승 제27호), 낙산사홍예문(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낙산사원장(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 낙산사홍련암(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
내용
오봉산은 낙산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로,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이다. 낙산은 범어 보타락가(補陀落伽, Potalaka)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해서 찾아갔다.
굴 입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좌구(座具)를 새벽물 위에 띄우자 용중(龍衆: 용의 무리)과 천중(天衆: 하늘나라의 사람들) 등 8부신장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드려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다시 바쳤다.
의상은 이들을 가지고 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여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이르기를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金堂:법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가 절에 이르기 전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였고,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승려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승려가 사랑이 맺어지기를 관음상 앞에서 염원하였는데, 해로하기 50여 년 만에 결국 고통을 안고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광수(李光洙)는 이것을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하였다.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낙산 위에 3칸의 건물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였다.
이 절은 고려 초기에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고려태조는 고려를 세운 직후 봄·가을로 낙산사에 사자를 보내어 재를 올렸을 뿐 아니라, 이것을 갑령(甲令)으로 삼았다.
그리고 속인들은 이 낙산의 굴 앞에서 예배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고 믿었는데, 1185년(명종 15) 당시의 병마사였던 유자량(庾資諒)이 굴 앞에서 예배하자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유자량이 청조의 영험을 보고 지은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몽고의 침략으로 이 절이 전소될 때 두 성상(聖像)을 모신 건물도 불타 버렸고, 여의주와 수정염주는 이 절의 노비가 땅에 묻고 도망쳤다가 난이 평정된 뒤 파내어 명주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감창사 이녹수(李祿綏)는 1258년(고종 45)에 각유(覺猷)에게 어부(御府)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음상은 이때 화를 당하여 형체만 남았고, 복장(腹藏: 불상의 복부 부분에 넣어 놓는 성스러운 물건) 속의 보물은 몽고병에게 약탈당하였다.
이규보(李奎報) 등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관음상을 봉안할 때 심원경(心圓鏡) 2개, 오향(五香)·오약(五藥)·색실·비단주머니 등을 관음상의 복중에 넣고 겉모습도 복구하였다. 1468년(세조 14) 세조는 학열(學悅)을 중창주로 삼아 이 절을 중창하게 하였다.
1471년(성종 2) 선학(仙學)이 용선전(龍船殿)·영산전(靈山殿)·어제루(御製樓)·승당(僧堂) 등을 보수하고 단청하였다. 4년 뒤 불탔으나 선학이 복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관음전과 관음상·정취전·금불상이 모두 소실되었다. 1631년(인조 9) 종밀(宗密)이 중창하였고, 1643년 도원(道源)이 중건하였으며, 1905년 경은(敬隱)이 선당(禪堂)과 후각(後閣) 등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3년 4월, 당시 1군단장이었던 이형근(李亨根)이 원통보전·범종각(梵鍾閣) 등을 복구하였으며, 1976년 원철(圓徹)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보전·종각·일주문·천왕문·선실·승당·객실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99호인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양양 낙산사 홍예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낙산사 원장(洛山寺垣墻), 보물 제1723호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낙산사 홍련암(洛山寺紅蓮庵) 등이 있다.
이 중 칠층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었던 것을 1468년의 중창 때 7층으로 개축했다고 전한다. 홍예문은 반월형의 문루(門樓)인데, 낙산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반월형의 문을 만들었는데, 이 26이라는 숫자는 당시 강원지부(江原之部)의 고을 숫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군수가 석재를 하나씩 모아서 세웠다는 속전이 있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적토(赤土)로 빚은 기와와 화강석을 배열한 것으로 전체 높이 4m, 둘레는 30여m에 이르고 있다. 근년에는 화강암으로 다듬은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을 조각하였는데, 석재는 전라북도 익산의 호남 채석장에서 반입한 것으로 750톤이 소요되었다. 조각가 권정환에 의해 1972년 5월 착수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되었다.
높이 16m, 둘레 3.3m, 좌대 넓이 6㎡이며, 좌대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 한 송이 연꽃으로 된 연봉(蓮峰) 위에 관음보살상을 안치하였다.
관음상은 왼손에 감로수병을 받쳐들고, 오른손은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으며, 미간에는 백호(白毫)를 박아 온누리에 퍼지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크기와 원만한 상호(相好), 균형 잡힌 체감미 등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 밖에도 이 절 옆에는 의상이 홍련 위에 나타난 관음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불전을 지었다고 전하는 자리에 세운 홍련암이 있으며, 의상이 좌선했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도량 전체가 사적 제495호 양양 낙산사 일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강풍을 타고 번진 산불로 낙산사는 큰 화재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은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 2015년 현재 화재로 손실된 사찰의 모습은 복원되었고, 주변 숲은 회복 중에 있다.
자료출처:한국민족대백과사전
대한민국구석구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