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선암사
부산 선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이다. 675년(신라 문무왕 15)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견강사(見江寺)라고 불렀으며, 절 뒷산 절벽 바위 위에서 화랑들이 무술을 닦으면서 절 이름을 선암사로 바꿨다고 한다.
선암사가 위치한 당감(堂甘)은 본디 제의를 올리는 신성한 곳으로, 당은 신이 내리는 신성한 나무를 모시는 집이고 감은 감로수를 뜻하는 말이다. 선암사 약수가 유명한 것도 그로부터 연유하며, 일찍이 이 곳은 우리 조상들이 한마음으 로 공동체를 이루면서 기도를 드린 신성한 도량이었다.
1483년(조선 성종 14) 각초(覺招)가 중창하면서 바꿨다고도 한다. 1568년(선조 1) 신연(信衍), 1718년(숙종 44) 선오(禪悟)가 각각 중수했고 1918년에는 동운(東雲)이, 1955년에는 혜수(慧修)가 중수한 바 있다. 1990년대 들어 불교교양대학과 원효합창단·불교봉사단 등을 세워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관음전·극락전·산신각·칠성각·원효각·명부전을 비롯하여 종각·종무소·요사채가 있다.
선암사기에 의하면 고려말 왜구들이 불상을 약탈해다가 절을 짓고 불공을 드렸는데 재앙이 잦아지면서 비명으로 목숨을 잃는 자가 많았다. 그래서 그 불상을 다시 배에 실어 응천으로 보내서(지금의 진해시 응천동) 성흥사에 모시고 공양을 올렸다. 이 일을 우연히 전해들은 동평현 사람 손성민이 경상도 관영에 아뢰고 몸소 스님과 함께 웅포의 성흥사(성덕사)로 가서 그 불상을 옛날과 같이 선암사 경내(현재의 극락전)에 모시게 되었는데 기도를 올리면 영험이 수승하다. 조선 성종14년(1483)에 각초선사가 중창하였고 선조 원년(1568)에는 신언스님이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되었다. 이어 숙종대(1718)에 선오스님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근세 선지식으로 유명한 혜월선사, 석암스님이 주석하시면서 지금의 사격을 이루었다.
* 선암사의 볼거리 *
대웅전을 중심으로 극락전, 관음전, 명부전, 조사전, 칠성각, 산신각, 요사채와 종각이 배치되어 있는 극락정토 도량이며 석축 위 동백나무가 매우 수려하다. 또한 최근에는 용왕단 불사를 하여 용왕님을 새롭게 모시고 있으며, 용왕전 폭포와 신선대의 절경은 가히 선암사 제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선암사 경내를 관통하고 흐르는 계곡에 돌다리의 자취가 극락교이며, 지금의 선암사 용왕단 뒤쪽으로 흐르는 조그마한 폭포가 선암폭포이다. 또한 선암폭포위로는 깎아지른 바위가 버티고 있는데 이것을 일러 신선암이라고 한다.
1957년 간행된 '부산교육'이라는 잡지에 게재된 내용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 학교 교사들이 조사한 것으로 극락전 불존불에 철불석가모니상이 모셔져 있는데 원효대사께서 인도에서 모셔온 철불(鐵佛)이라고 전해온다고 하였고 150여 년 된 원효대사 초상화가 있다고 조사되어 있다. 이 철불에 대한 기록이 1966년 발간된 개항90년과 1969년에 발행된 부산의 고적과 유물에도 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불상의 행방을 알 수 없다. 아마 이불상이 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불상의 하나로서 그 문화재적 위상으로 선암사의 사격이 한층 높아졌을 것이다.
더욱이 원효대사 초상화 불화도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1969년 당시 선암사의 경내 전각은 극락전 외 소림당(小林堂) 칠성각(七星閣) 산신각(山神閣) 독성각(獨聖閣) 삼성각(三聖閣) 등 6동(棟)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특히 독성각 중앙의 나한상(羅漢像)은 500년 이상 된 고불(古佛)이라고 전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 뒤 극락전 영역 마당 한쪽에 석탑 옥개석 3개가 있는데 개략적 형태로 보아 신라시대 석탑부재로 보이는데 원래 견강사에 있던 석탑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 괘불은 1926(불기 2953)년 금어편수(金魚片手) 소가(小可) 비구(比丘) 구봉경운(龜峰鏡雲)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화기에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라고 기록되어 있다. 도상은 화면에 거신형 광배를 지고 본존이 입상으로 꽉 차게 표현한 것이다.
방형얼굴에 높은 육계, 큼직한 계주, 또한 이목구비는 도식적으로 정돈된 느낌이 강하다.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으로 마치 꽃가지를 받쳐 드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의습도 적색을 중심으로 녹색과 군청을 회색의 군의에서 음영을 강하게 사용하고 있다. 얼굴과 가슴과 두 팔, 두 발 등에서 윤곽에 음영을 사용하여 서양식의 명암법을 사용하고 있다.
두발은 연화대좌에 직립하고 있어 직선적인 느낌이 든다. 광배는 녹색의 두광과 광선문의 신광이 결합된 거신형 광배이다.
이 괘불은 생경한 얼굴의 표현과 명암, 직립된 자세, 탁한 색채 등은 조선 말기에서 근대화로 변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같은 해에 조성된 충남 향천사(香泉寺) 괘불(1926년) 금호당(金湖堂) 약효(藥效)가 표현한 둥근 얼굴과 뾰족한 유계, 유난히 작게 표현한 두 손 등과는 다른 충청도 일원과 경상도의 지역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화기의 “세존응화이천오십삼년병인이월 동래군서면 선암신화성(世尊應化二千五十三年丙寅二月 東萊郡西面 仙巖新畵成)/미륵존상잉봉안간본사(彌勒尊像仍奉安刊本寺)"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의 도상적인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조선말기에서 일제 강점기의 즉 20세기에서 21세기까지 괘불이 15여점이 전해오는데 대부분 영산회상도의 개념이지만 여래형이면서 시무외인을 짓거나 꽃가지(용화수)를 들고 있는 모습이어서 미륵불일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면 개운사(開運寺) 괘불(1879년), 내원암 괘불(1885년), 봉은사 괘불(1886년), 화장사(華藏寺) 괘불(1901년)은 여래형에 꽃가지(용하수)를 들고 있어 미륵존불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양주 흥국사(興國寺) 괘불, 망월사(望月寺) 괘불, 해인사(海印寺) 괘불 등은 시무외인(施無畏印)의 수인을 하고 있어 미륵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산 선암사 괘불의 화기 기록을 통해 조선후기에서 말기까지 괘불의 도상은 영산재를 지내는 영상회상도의 개념에서 현재와 미래를 상징하는 의미로써 "미륵불"과 미륵보살이 대중적인 관심을 끌고 있었다는 점을 살필 수 있다.화기에 많은 시주자들의 명단으로 보아 대규모의 괘불 조성이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