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소리 1

 

김 익 택

 

 

 

 

 

가을은

서둘러 가야 할 바쁜 소리들이 있고

조용히 땅으로

스며들어야 할 소리들이 있습니다

 

들판의 낟알들

숲 속 풀 벌레들은

바람의 계절이 등을 떼 밀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자취를 감춥니다

 

누구에게나 생명은 하나

죽은 뒤 다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분주하고 시끄러운 것은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맑고 깨끗한 산속 옹달샘처럼

내가 떠난 그 자리가 맑은 것은

너를 위해서 아니라 나를 위한

마음의 빈 공간입니다

 

그래서 가을의 소리는

아름다워도 외롭고

시끄러워도 그리운 것입니다

 


가을의 소리 2

 

김 익 택

 

가여운 이슬에 떨고 있는 단풍잎은

이슬이 서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이 하얗고 하늘이 더욱 파랄 수록

붉음은 푸름을 되돌릴 수 없듯이

 

붉어서 아름다운 것은

가을 하루가 너무 아까워

속이 타버렸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잠자는

까만 밤에도

붉음은 더 붉게 물듭니다

 

생각이 꿈을 만들고

상상이 기와집 수백 채를 짓고 허물때도

붉음은 더 붉어질 뿐 푸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

붉어져야 새로운 푸름이 시작 되기 때문입니다

 

단풍 너를 보면

 

김 익 택

 

 

삶의 의무 끝 자락

춤추며 작별하는 것이 너 아니고 또 있을까

 

인연의 끝 자락

화려한 화장을 하는 것이 너 아니고 또 있을까

 

벼랑에 선 삶이 아닐지라도

추함과 미학이 극과 극이 아닐지라도

생의 시작과 끝은 분명 한 법

 

감탄은 잠깐일지 몰라도

울음은 긴 것일지라도

 

너를 보면

노여움으로 가득 찬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피의 인내로 이겨낸 벅찬 환희의 미소가 아니런가

 

가을단풍

김 익 택

 

 

아직 귀천하지 못한 물안개

단풍잎 그늘 사이 사이에서

빛 갈림을 하고 있고요

햇살 끝자락에 물든 단풍잎은

바람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

우와 소리

붉음을 주체하지 못한 절찬인가요

아니면

더 높은 파란 하늘에 대한 항의 인가요

 

바람이 나무 허리를 휘청거리게 할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잎새

마지막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꿋꿋이 일년을 버텨 낸

나무가 아니면 줄 수 없는 감동이겠지요

 

가을 바람꽃

 

김 익 택

 

 

무더위 끝자락

 

산들바람 붙잡고

코스모스가 피면

뒤따라 이슬자락 머금고

들국화가 핍니다

 

산들바람 끝자락

 

들국화가 피면

서리 오기 전

채 갈무리하지 못한 갈대꽃이

서둘러 핍니다

어떤 사색

 

김 익 택

 

 

자연이 제 임무를 다하는 동안

나는 오늘도 하루를 그냥 까 먹고 말았다

 

반세기 넘는 동안

의미 없이 까먹은 시간 얼마일까

 

저무는 시간이 짧은 지금

어렴풋이 나를 알고부터

나를 닦으려고 책을 펼쳐 들고

건강을 다지려고 등산해도

 

주인을 원망하듯

머리는 잊기 바쁘고

몸은 가쁜 숨을 재촉한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

노란 은행잎 아래

벤치 앉아 있는 나

오늘따라 사색이 아프다


즐거워서 행복한 하루 되기를

 

김 익 택

이로워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즐거워서 행복한 하루 되기를

그 마음이 그리움을 키웠는지 몰라요

 

그대 생각 날 때마다

하루하루가 일일여삼추

처음 생각은 그리웠어도

마지막 생각은 외로웠지요

 

생각만으로 만족 할 수 있는

우주여행처럼

목적 없는 항해 아닌데도

생각의 끝 닿는 곳 없었지요

 

그대 있는 곳

감히 갈 수 없는 땅 끝 아니고

하늘 끝 아닌 가까이 더 가까이

바로 곁에 있어

숨 소리로 소통할 수 있어도

 

내 마음에

유리 벽 하나 가려져 있어

그대는 저 먼 곳 사람 다름 아니었지요

가을 그리움

김 익 택

 

 

 

온 들판이

오곡으로 가득한 가을

더는 살 수 없다고

떠날 채비를 하는 철새들이 있고

 

온 들판이

뭇 서리밖에 없는 가을

약속의 땅인 양

앞 다투어 날아오는 철새들이 있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은 잎을 보지 못하는

붉은 그리움같이

 

가을은 아쉬움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계절 이별과 만남이

숨 쉴 때마다 행복한 계절이다

 

너의 생각 깊어질 때

김 익 택

 

 

 

네 생각이 나를

힘들게 해도

나는 너를

의심 못합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아프면 아플수록

나는 너를

더 잊지 못합니다

 

조울증 환자처럼

우울증 환자처럼

너를 위한 생각

더욱 깊어져

안절부절 못합니다

나무의 삶

 

김 익 택

 

 

 

 

 

봄부터 겨울까지

나무는 항상 그곳에서 하루를 맞습니다.

비를 맞고 바람을 맞고

싫던 좋던 관계없이 아낌없이 맞습니다

고난 역경에도 더욱 살겠다는

생명본질에 충실 그 나만 의미 있을 뿐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자포자기 모르며 자살을 모릅니다

 

비바람 몰아치는 밤에

 

김 익 택

 

 

 

빗방울이 자살 폭격기처럼

유리창에 쏟아지고

바람이 배란다 창살을 잡고 우는 밤에

문득 스쳐가는

정어리때 공격하는 북방가넷

 

살기 위한 처절 몸부림이

열정적인 것인지

절호의 기회인지

일년의 단 한번 박싱데이

아울렛 가게 앞에 줄지어 선 사람들처럼

행복한 모습 아닌데

 

이 밤

윙윙 웅웅 따다닥

바람도 살아있고

빗방울도 살아 있고

유리창도 살아 있고

베란다도 살아서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바람의 의무

김 익 택

 

 

 

서릿발 일어서는 아침

작은 바람에도 날라가는 열매와 풀 씨들은

부대끼며 부대낄수록 아프다고 울고

홀로 떨어져 있으면 또 외롭다고 웁니다

 

의무라는 것은 권리보다 귀중한 것이기에

내가 싫어도 해야 합니다

 

스스로 땅속으로 스며들기 전까지

비가 몸을 적시기 전까지

바람은 잠시도 보고 있지 않습니다

 

허공에서 공놀이를 하다

구석진 곳에 모아두기도 하고

회오리 속으로 밀어 넣어

멀리 낯선 곳으로 날려 보내기도 합니다

 

그 이유 농부가 빈 논을 갈아 엎듯이

바람은 싫어도 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종족 번식을 위해 자연을 위해

새로운 곳

더 먼 곳으로 날려 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이 아름다운 이유

 

김 익 택

 

 

 

 

 

스포츠 결과가 아니더라도

가을의 결실이 아니더라도

처음보다 마지막이 더 아름다운 것은

삶의 이치입니다

 

마지막이 아름다운 것은

처음과 과정

그 긴 시간 있었을 고뇌 절망들을

사랑이라는 보자기에 희망을 담아

나를 매진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은 언제나 할 수 있을까 잘 할 꺼야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합니다

 

과정은 또 고뇌와 절망

과욕과 절재를 작게 할까 크게 할까

순간순간 모험에 명석한 판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과오와 실수로 실패를 했다 하드라도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후회와 뉘우침 반성과 재도전

결심과 재충전 묻어 두고 가는 것이 아니라

환히 밝혀 옥석을 가려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실패 속에 성공의 지혜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존귀함과 절실함은

실패를 겪어봐야 그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한번 있는 일출과 일몰의 노을 중

일몰이 더 아름답습니다

삶의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할 이유

바로 거기 있습니다

11월은

 

김 익 택

 

 

 

열매 익는 10월 바람은

가벼울지 몰라도

이슬이 서리가 바뀌는

11월은 가볍지 않습니다

 

서리 맞고 고개 숙인 구절초 향기는 더 짙고

서리 맞은 홍시 속살 더 붉어도

서리 맞은 들판에 빈 바람은 아픈 소리를 냅니다

 

마를 대로 마른 고추대와 옥수수는

삭은 잎으로 작은 바람에도 아프다고 울고

앙상한 나무들은 부딪칠 때마다

뼈 마디로 웁니다

 

땅속으로 들어가야 사는

들 짐승들은

언 땅에 얼음장 소리로 울고

땅 위에 사는

날 짐승들은

눈 밖에 없는 앙상한 나무 가지에서

칼 바람으로 웁니다

짙어 가는 가을에

 

김 익 택

 

 

 

하늘 맑고 흰구름은 평화로운

동화 속의 풍경

 

투명한 바람은

산들을 홍엽으로 물들이고

국화는 벌 나비들의 불러들여

날개 짓 소리 가득하다

 

가을은 하루의 햇볕은

부지런한 삶들에게 후한 손님입니다

 

 

풀벌레가 우는 이유

 

김 익 택

 

 

 

 

이슬이 차가울수록

더 슬프게 우는 풀벌레

그 울음 알기까지 수 십 년

 

타는 목마름으로

나를 알리는 몸부림

나를 알리는 구애가

 

사라지기 전

남기고 가야 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한 처절한 소리라는 것을

11월 길목에서 나를 생각해 보다

 

 

 

 

 

 

구렁이 담 너머 가듯

10월을 보내고

순둥이같이 맞이한 11월

 

빈 하늘이

구름을 채우고 버리는 동안

나는 내 머리에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버렸을까

 

궁금 하지도 않고

안타깝지도 않는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되고 일개월이 지나

어느새 11월 말

 

먼 훗날

삶의 책임소재

물을 길 없는 시간이 다시없을 때

소리 없는 늙음을 어떻게 나를 추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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