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소리
김 익 택
습기가 온 몸을 엄습하는
일요일 늦은 아침,
문득 가슴을 파고드는
창 밖의 비 소리를 가만이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 속에 삶의 소리가 있다
따닥따닥 내 어머니 부엌에서 장작불 때는 소리도 있고
뽀그락뽀그락 내 어머니 가마솥에 밥 익는 소리도 있다
저벅저벅 물을 밟고 걸어오는 저 소리는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논둑 길 걸어 나오는
우리아버지 발자국 소리도 있고
마른 먼지 폴폴 일으키며 토닥토닥 달려와서
아빠하고 가슴에 안기는 딸아이 발자국 소리도 있다
가을 숲길을 가로질러 사부작사부작 낙엽 밟는 소리는
예의 바른 숙녀가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도 있고
오는 비 가는 비 다 맞고서
철벅철벅 걸어가는 군인의 발자국 소리도 있다
사하라, 고비, 그랜드케니언 사막에서
마른 먼지 일으키며 다다다다 달려오는 말발굽소리도 있고
겨울을 부르는 늦은 가을
탱자나무 울타리가 사납게 휘파람을 불고
앞 마당에 먼지가 회오리 칠 때
뒤간에서 후두둑 감 떨어지는 소리도 있다
탁탁 어깨를 두드리며 하늘을 쳐다보는
우리 할머니 삭정이 같은 손바닥 소리도 있고
뻐근한 목 부여잡고 앞으로 옆으로 머리 젖힐 때마다
두두둑 거리는 내 아버지 목뼈 제자리 찾는 소리도 있다
이렇듯 창 밖의 비 소리를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 속에 무언가 얘기하는 소리가 있다
녹고 녹아서 물이 되는 삶의 소리가 있고
바래고 바래서 바람 되는 삶의 소리가 있고
바스러지고 가루 되어 흙이 되는 삶이 있다
나무와 나무 숲과 숲을 헤쳐가는
저 비바람 소리는
해마다 같은 계절 같은 비 같은 홍수를
다시 겪지 말라는 입바른 경고 소리도 있다
능소화는 비를 맞고도 웃는다
김 익 택
능소화가 비를 맞고 있다
능소화 꽃잎에 맺힌 빗방울이 웃고 있다
아이의 눈물을 같은 빗방울은
속이 아리도록 맑다
무색이 저리도 맑고 붉음을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줄기에 올라오는 물의 양심이
맑기 때문일 것이다
투명이 질식하도록 아름답다는 사실을
태양이 그 빗방울을 보았다면
사죄할지도 모르는 일
저렇게 비를 맞고도
생글생글 웃고 있으니
악인인들 마음이 붉지 않으리라
사랑이라는 이름 그냥
붙은 것이 아닌 것이다
순수한다는 것은
맑음을 만났을 때 하는 말
내 눈이 붉은 심장을 쫓아
절로 따라붙는 그 열정 어쩌지 못하고
내 기어이 손 끝에 물방울을 묻히고 말았으니
내 손끝에 묻은 물은
붉음도 맑음도 아닌
그냥 한 방울의 물이다
'꽃이 있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용산서원 백일홍 (0) | 2019.08.12 |
---|---|
고성 만화방초 수국 (0) | 2019.07.29 |
김해대동수안리수국축재 (0) | 2019.07.08 |
능소화 그대는 (0) | 2019.06.24 |
수로왕릉 능소화 미학 (0) | 2019.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