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의 봄
김 익 택
삶의 진리 그 의미 찾기 위해
죽음을 무릎 쓴 정진 수련은
나를 찾고 너를 찾는 삶의 화두
그 진리를 찾아
인간사 바른길 인도하는
선승 배출한 우리나라 최대 도량
조계산 송광사에 봄빛이 물들었다
삶이 무엇이지 사랑이 무엇인지
끝없는 고민 풀지 못해
내 갈 길 잊거나 잃어버리는 것이
속세 삶들의 속성
그 인습 일 깨우기 위해
송광사 법승은
잠들어도 잠들지 않는다
보살의 기도
김 익 택
계곡의 물소리
더 맑고
나무들 푸른데
나와 가족
안녕 위해
두소 모은
불자
얼굴 빛이 봄이다
화두는
김 익 택
저 산 푸른 숲
봄 여름 가을 겨울
적응하며 살아가듯
삶에는 졸업이 없다
있다면
죽는 그 날까지
휴식만 있을 뿐
살아 있는 동안
살고 있는 동안
심장이 뛰고 숨을 쉬듯이
끓임 없이 생각해야 하고
끓임 없이 노력해야 하느니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 화두를 놓으면
휴식 아니라 포기
다시 시작은
숲길 아니라 가시밭길이네
송광사 비사리구시
김 익 택
죽어서 사는 박물관의 유물은
세월이 삶이고 죽음이 삶이다
그에게 있어 퇴역이라는 말은
새로운 시작이다
비사리구시 너를 보고 있으면
비바람에 닳아 없어지는
너의 육신이 애닯다
오늘 하루도 붙잡지 못한 시간은 흘러가고
너는 갈라진 틈 사이로 바람소리로 말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고 만다
나이 팔백세 추정
한끼 밥상 사천명 분의 쌀을 씻을 만큼 큰 비사리구시
얼마나 사용됐고 언제 퇴역했는지 모르지만
모르긴 해도
너무 커서 이 귀퉁이 저 귀퉁이 옮겨 다녔으리라
마치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방치된 것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 물소리 쌀 씻는 소리는
스님이 외는 염불 다름없었으리라
송광사 개요
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에 있는 조계산 자락에 새둥지처럼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그 첫째는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켜서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서 불법을 크게 펼 절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보조 국사 지눌스님과 연관된 전설이다. 곧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깍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절이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인종때 석조(釋照)대사께서 절을 크게 확장하려는 원을 세우고 준비하던 중 타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페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불일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의(명종 27년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 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정유재란, 6.25사변 등 숱한 재난을 겪었으나 지속적인 중창불사로 지금의 위용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석조 대사 이후 50여년 동안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새로운 규모로 중창되고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지눌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이다. 지눌은 9년동안의(명종 27년, 1197~희종 원년, 2004) 중창 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 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드디어 송광사가 한국 불교의 중심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거조사로부터 길상사로 정혜결사를 옮겨와 수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까운 곳에 정혜사라는 절이 있어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산이름도 송광에서 조계로 바꾸었다. 뒤에 절 이름도 수선사에서 송광사로 불리게 되어 조계산 송광사로 되었다. | ||||||||
혜심 스님이후 180년이 지난 조선조 초 16국사의 마지막 분인 고봉화상께서 원을 세워(1395년) 유서 깊은 도량을 중창하기 시작하였다. 고봉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中印)선사께서 중창 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의 증축을 하였다 한다. 제 4 중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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