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김 익 택
보이는 건 산 밖에 없어도
보이는 건 바다 밖에 없어도
도시에는 없는
묵은 김치 같고
된장 같은 인정이 있습니다
사람 사는 곳이
그 어디던
고향 떠나 생각하면
고향은 천국
눈물 밥 먹고
콧물 밥 먹고 살았어도
그 무엇으로 매울 수 없는
그리움이 쌓이는 곳입니다
내가 살던 고향은
김 익 택
이른 새벽
굴뚝 연기가 상모 띠처럼 초가집 주위를 감싸고
마당엔 장 닭이 회를 치면
소 똥 망태 들고 집 나서는 할아버지
대바구니 들고 홍시 주우려고 들판으로 가는 아이
지금 시골 길에는 소 똥도 볼 수 없고
쇠똥구리도 살지 않습니다
홍시가 땅에 지천으로 떨어지기까지
감나무에 올라가 따 먹는 아이 없습니다
지금 이른 새벽은
차들의 매연과 소음천지
아이들 가슴에
잡힐 듯 말 듯 그리운 아지랑이 같은
외갓집 추억 없습니다
고향은 찾아가도 낯선 사람밖에 없고
외갓집은 오래 전 남의 집이 되어 찾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살던 고향
가고 싶은 외갓집 그리움은
그것도 멀지 않아 또한 전설이 될 것입니다
예전에 농사는 물 싸움으로 시작되었지요
김 익 택
6.25 전쟁 끝나고 1960년대
조국 강산은 헐벗은 철모처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너도 나도 먹고 살기 위해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생명을 연장하고
내가 살기 위한 몸부림은
민심과 인심이 극도로 피폐했지요
5월 단비에 천수답 다락 논에 물 잡이가 시작되면
아전인수는 목숨 걸고 싸우는 장닭같이
삽 자루가 날라가고 지게 작대기가 춤을 추는
이웃은 이웃이 아니었지요
한 해 농사 절반은
내 논에 물이 마르지 않는 것
칠흑 같은 여름 밤은
물길 지키느라 밤을 새었습니다
제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 듣고 있는
농부는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과 진배없었습니다.
고향의 소리
김 익 택
그때는 허물어져가는 초가집
방안에서도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돌담 골목길에서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로 넘쳐났다
곰방대 물고 담배를 피던
할아버지의 미소는
아름다웠고
길쌈 삼던 할머니 손길은
부드러웠다
앞마당을 배회하는 암탉소리는
정다웠고
동네가 떠나갈 듯 짖던 똥개소리는
반가웠고
마당에 메어둔 어미 소 울음소리는
한가로웠다
동네를 가로질려 흐르는 냇물은
거울처럼 맑았고
코끝을 스미는 바람 냄새는
풀꽃처럼 향기로웠다
돌담 너머 아이들 책 읽는 소리는
아침처럼 생기가 흘렸고
처녀를 부르는 총각 휘파람 소리는
소쩍새소리처럼 애달팠다
장다리가 튼실한 남정네의 쟁기질소리는
힘이 넘치고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낙 등의 아이 울음소리는
요령처럼 요란했다
늦은 밤 골목길에 술 취한 동네어른 노래 소리는
구슬펐고
정지간 며느리 흐느끼는 소리는
애처로웠다
그래도 그때 마을 사람들은
가난해도 마음만은 순수를 잃지 않았고
인정은 알을 품는 어미 닭처럼 따뜻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김 익 택
나른한 봄 날
아침
보리밥에 된장
목에 걸리 넘어가지 않고
밥맛 입맛 없어
밥 숟가락 들다 말다 하면
우리 아버지 불 호령
밥을 와 그리 먹노 맛있게 안 먹고
밥맛이 없어 못 먹겠어요
뭐러카노 한 이틀 촐촐 굶어봐라 그런 소리 나오나
돌도 씹어먹을 끼다 잔소리 말고 맛있게 먹어라
밥상머리에서 밥투정하면 복 나간다
먹는 것 입는 것
거지와 다름없던 시대
보리 고개 5월은
산과들 강가의 먹을 거리는 다 뜯어 먹었지요
디지털 시대 5월
그 말은 전설 아닌 전설
집집마다 진수성찬 밥상에도
밥 투정
너무 잘 먹어
소아 당요 소아 비만이 사회문제
굶어서 살 빼는 시대
한평생 굶주리다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한평생 노동에 시달리다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
땅속에서 웃을까
하늘에서 걱정할까
그리웠던 고향의 계절 풍경들
김 익 택
잔 설이 가시지 않는 이른 봄날에
온 산과 들에 진달래가 붉게 피면
우리 아버지 땔나무 지게 따라
노랑나비 촐랑대며 따라 다녔고요
삼복더위도 시원했던 여름
당수나무 그늘 아래엔 동네 어른들 모여서
집안 대소사 세상 돌아가는 얘기 주고받던 장소였답니다
그리고 가을
백 년을 하루같이 집안을 지켜보던
감나무의 붉게 익은 감은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돈 주고 사지 않는
제사상에 오르는 과일이었고요
대나무 바람소리가 정적을 깨던 엄동설한 깊은 밤
뒷산 대밭 부엉이 소리는
어느 억울한 혼령소리 같아 이불 속을 파고 들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