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손 탁영공

 

김 익 택

 

 

 

 

삶이 무엇이며

정의가 무엇이던가

 

충성도

정의 아니면

비판하고 직언해야

신하된 사명

 

그 명재 지켰던 탁영공

생은 짧았어도

그의 맑고 강직한 정신

 

이 땅의 사는 사람

붉은 피로 살고 정신으로 산다

 

 

탁영공의 정의

김 익 택

정의가 깊고 충성이 깊으면

시기하는 세력

거짓 아부도 그만큼 교활하고 음흉한 법

 

세조 욍위 찬탈 빗대어 쓴

점필제공의 조의제문

사관 탁영공

사초 사건 무오사화

 

공의 죽임이 억울해

앞 냇가 맑은 물도

3일동안 붉었다 했던가

무심 세월 오백년 지나는 동안

서원은 임진왜란 6,25때 소실되고

허물어져 중건하기를 몇 번해도

 

공께서 심으신 은행나무는

그 옛날 공의 젊은 의기같이

위풍당당하다

 

사람사는 동안 정신 살아있듯

공의 올 곧은 정의로움은

천년 만년 사람들 가슴에 숨 쉬리라

 

자계서원의 감회

 

김 익 택

 

 

 

 

때이른 서리로 잎 떨어진

앙상한 은행나무

그 옛날 탁영공

갑작스런 죽음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운데

서원을 들러 싼

초록 대나무 울타리가

공의 따뜻한 온정 같이 포근하다

정의와 충의로 직설 마다 않고

조의제문 사초로 목숨을 잃은

그의 짧은 생애가

나그네 어림짐작으로

강직하고 우직해

외롭고 쓸쓸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고향집 안방처럼 너무 포근해서

공의 넓은 사랑 아니면

표현할 방법이 없다

 

자계서원에서

 

김 익 택

 

 

 

 

 

죽음 그 앞에

살기위한 야비한 생각

그에게 왜 없지 않았을까

부모형제

친구 선 후배

잠 못 이루는 수많은 생각

그에게 왜 없지 않았을까

내 한사람 부귀 영화

그 보다

나라위한 충성심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은 아닌 것

의심없이 택했던 정의

그 정신이

자계서원 빈 뜰에 훈풍으로 감돈다

 

탁영선생님을 위한 추도

김 익 택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이 찌릿한 감정

무엇인지

이해 못하고 설명 못해도

아픔으로 쓰고 미안함으로 씁니다

그 많은 정

그 많은 추억

그 많은 사랑

그 많은 식견

나라위한 충성과 정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린

그 깊은 뜻

어찌 헤아릴까

그 곳에도

왕도가 신의가 있고 정의가 있습니까

거기도 부모형제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부디 영면 하소서

뒤돌아보지 말고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사랑까지 모두 내려놓고

자계서원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이서면에 있는 조선전기 김일손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교육시설. 시도유형문화재.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내용

1518년(중종 13)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일손(金馹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자계사(紫溪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576년(선조 9)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615년(광해군 7) 중건하고 김극일(金克一)과 김대유(金大有)를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1661년(현종 2) ‘자계(紫溪)’라고 사액(賜額)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毁撤)되었으며, 그 뒤 1984년에 복원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5칸의 강당,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3칸의 전사청(典祀廳), 2층 3칸의 영귀루(詠歸樓), 외삼문(外三門), 비각(碑閣), 4칸의 고자처(庫子處) 등 12동의 건물과 천운담(天雲潭)·탁영대(濯纓臺) 등이 있다.

사우에는 김일손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김극일과 김대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전사청은 향사(享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며,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수학하며 거처하는 곳이다.

영귀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생들이 모여서 시부(詩賦)를 짓기도 하는 곳이며, 비각에는 김극일의 효행을 찬양한 것과 신도비(神道碑)와 원정비(院庭碑) 등이 있다. 영귀루·동재·서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변(籩)4두(豆)이다.

유물로는 칠현금(七絃琴)이 보관되어 있고, 문집은『연려실기술』 등 수십 권이 소장되어 있으며, 재산으로는 전답 3,000평과 대지 5,000평 등이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참고문헌

전고대방(典故大方)

태학지(太學志)

『경상북도사(慶尙北道史)』(경상북도,1983)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집필자

집필 (1995년)

이동춘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자계서원(紫溪書院))]

조의제문

[ 弔義帝文 ]

요약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纂奪)을 비난한 글.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정축년(丁丑年) 10월 밀양에서 경산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잠을 잤다. 꿈속에 신선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 의제) 손심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彬江)에 버려졌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잠에서 깨어나 생각해보니 회왕은 중국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 사람으로 거리가 만리(萬里)나 떨어져 있는데 꿈에 나타난 징조는 무엇일까? 역사를 살펴보면 시신을 강물에 버렸다는 기록이 없으니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회왕을 죽이고 시체를 강물에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야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한다. - (연산군 일기 4년 7월 17일)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고, 김일손·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허반(許盤) 등이 참수(斬首)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의제문 [弔義帝文] (두산백과)

조의제문은 단종과 세조를 초나라 의제와 항우에 비유했다. 문장이 워낙 난해해 당대의 식자층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조의제문을 접한 연산군이 "어찌 이 글이 세조를 능멸하고 노산군을 위한 제문이란 것인가?"하고 되물을 정도였다고 한다.

항우는 스스로 보위에 오른 뒤 의제를 강에 던져 죽인다. 김종직은 단종의 시신이 강에 떠내려갔다는 풍설을 듣고 중국의 고사에 빗댄 것이다. 이 글은 이미 죽어 땅에 묻힌 김종직을 부관참시(죽은이를 다시 관에서 꺼내어 시신을 다시 한번 더 죽임)시키고 숱한 선비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김종직이 弔義宰文(조의제문)을 짓게된 연유를 그 서두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축년丁丑年(세조3년) 10월 밀양에서 경산(오늘의 성주)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잤다.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키가 크고 인품이 있는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항우)에게 죽음을 당하여 빈강彬江에 빠져 잠겨 있다."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깜짝 놀라 잠을 깨어 생각하니, 회왕은 남방 초나라 사람이고 나는 동이東夷(조선)의 사람이다. 땅이 서로 만 리나 떨어져 있고 시대가 또한 천여 년이나 떨어져 있는데 내 꿈에 나타나는 것은 무슨 징조일까. 또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물에 던졌다는 말은 없는데 아마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쳐죽여 시체를 물에 던졌던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늘이 사물과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그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높일 줄 모르리오. 중화中華 사람에게만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니,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으리오. 나는 동이 사람이고 천 년이나 뒤에 났는데도 삼가 초의 회왕을 슬퍼하노라.

 

옛날에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을 휘두르니 사해四海의 물결이 모두 피가 되었다. 비록 전어, 상어, 미꾸라지, 고래인들 어찌 보전하리오. 그 물에서 빠져나오고자 하여 바쁘게 날뛰었다. 이때 육국六國의 후손들은 세력이 없어지고 딴 곳으로 피난하여 겨우 평민과 같이 지냈다. 항량項梁은 초楚의 무장 집안의 자손으로서 진승陳勝의 뒤이어 일을 일으켰다. 회왕을 찾아내어 백성의 여망에 따랐으므로 멸망했던 초나라를 다시 보존하게 되었다. 건부乾符를 쥐고 천자가 되었으니 세상에서 미씨氏 보다 높은 이가 없었다. 유방을 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가게 하니, 또한 그 인의를 볼 수 있겠다. 양羊처럼 성내고 이리처럼 탐욕 하여 관군을 함부로 죽였는데도 어찌 그 항우를 잡아 처형시키지 않았는가. 아아, 형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회왕을 더욱 두렵게 여긴다. 길러놓은 자에게 도리어 해침을 당하였으니 과연 천운이 어긋났도다. 빈彬의 산이 험하여 하늘에 닿으니 햇빛이 어둑어둑 저물려한다. 빈彬의 물이 밤낮으로 흐리니 물결이 넘쳐서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한 천지간에 한이 어찌 다하리오. 혼령이 지금도 정처 없이 헤매고 있구나.

나의 마음이 쇠와 돌을 뚫을 만하니 회왕이 갑자기 꿈에 나타났도다. 주자朱子의 필법을 따르자니 생각이 불안하고 조심 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면서, "영령英靈이시여 와서 흠향歆饗하시기 바랍니다." -김종직-

 

조의제문(弔義宰文)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법칙을 마련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그 사대(四大: 道天地王) 오상(五常)(인의예지신)을 높힐줄 모르리오. 중화 사람에게만 넉넉하게 주고 동이 사람에게는 부족하게 준 것이 아니니, 어찌 옛적만 있고 지금은 없으리오. 나는 동이 사람이요. 또 천 년 이나 뒤에 났건만, 삼가초 회왕을 슬퍼하노라. 옛날 조룡(진시황)이 어금니와 뿔을 휘두르니, 사해의 물결이 붉어 피가 되었네. 비록 전어, 상어, 미꾸라지, 고래라도 어찌 보존하겠는가. 물을 벗어나기에 급급했느니, 당시 육군(진에게 망한 전국시대 여섯 나라)의 후손들은 숨고 도망가서 겨우 평민같이 지냈다네. 항량은 남쪽 초나라 무장 집안으로, 진승을 이어 일을 일으켰네, 왕을 찾아내어 백성이 바라는 바에 따랐으니 멸망했던 초나라를 다시 보존했네. 건부를 쥐고 천자가 되었으니, 천하엔 진실로 미씨(초의 성)보다 큰 것이 없도다. 장자를 보내어 관중에 들어가게 함이여! 또한 족히 그 인의 를 보냈도다. 양처럼 성내고 이리처럼 탐욕하여 관군을 마음대로 죽였는데도 어찌 항우를 잡아다 처형하지 아니했는고. 아아. 형세가 너무도 그렇지 못했으니, 나는 희왕을 위해 더욱 두렵게 여겼네. 길러놓은 자에게도리아 해침을 당했으니, 과연 하늘의 운수가 어긋났구나. 빈의 산은 우뚝하여 하늘에 닿으니, 그림자가 해를 가리어 저물려고한다. 빈의 물이 밤낮으로 흐름이여! 물결이 넘실거려 돌아올 줄 모르도다.

천지가 장구한들 한이 어찌 다하리. 넋은 지금도 정처없이 헤매고 있구나. 나의 마음은 돌과 쇠도 뚫을 만하니 회왕이 문득 꿈속에 나타났구나. 주자의 필법을 따르자니, 불안하고 조심된다. 술잔을 들어 땅에 부으면서 '바라건데 혼령은 와서 흠향하소서."

 

조의제문은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이 세조(世祖)의 찬탈(纂奪)을 비난한 글로서 운문체로 씌어졌다. 김종직이 1457년(세조 3) 10월 밀양에서 경산(京山 : 星州)으로 가다가 답계역(踏溪驛)에서 숙박했는데, 그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나타나 전한 말을 듣고 슬퍼하며 지은 글이다.

김종직은 항우(項羽)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端宗)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글이다. 이 글을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사초(史草)에 적어 넣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는데, 그 때의 편찬책임자는 이극돈(李克墩)으로 이른바 훈구파(勳舊派)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김일손의 사초 중에 이극돈의 비행(非行)이 기록되어 있어 김일손에 대한 앙심을 품고 있던 중,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 중에서 발견한 이극돈은 김일손이 김종직의 제자임을 기화(奇貨)로 하여 김종직과 그 제자들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사림파(士林派)를 숙청할 목적으로,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 일파를 세조에 대한 불충(不忠)의 무리로 몰아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움직여, 큰 옥사(獄事)를 일으켰다.

 

이것이 무오사화(戊午史禍)인데, 그 결과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이미 죽은자를 무덤에서 다시 관을 꺼내어 시신을 다시 한번 죽임)를 당하였고, 사림파 김일손 ·권오복(權五福) ·이목(李穆) ·허반(許盤) ·권경유(權景裕) 등은 선왕(先王)을 무록(誣錄)한 죄를 씌워 죽이고, 정여창(鄭汝昌) ·강겸(姜謙) ·이수공(李守恭) ·정승조(鄭承祖) ·홍한(洪澣) ·정희랑(鄭希良) 등은 난을 고하지 않은 죄로, 김굉필(金宏弼) ·이종준(李宗準) ·이주(李胄) ·박한주(朴漢柱) ·임희재(林熙載) ·강백진(姜伯珍)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로 귀양보냈다.

 

김종직(金宗直)

1431(세종 13)∼1492(성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 문충(文忠). 밀양출신.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아버지는 사예 숙자(叔滋)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로 사재감정(司宰監正) 홍신(弘信)의 딸이다.

1453년(단종 1)에 진사가 되고, 1459년(세조 5)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1462년 승문원박사로 예문관봉교를 겸하였다.

이듬해 감찰이 된 뒤 경상도병마평사·이조좌랑·수찬·함양군수 등을 거쳐 1476년 선산부사가 되었다.

1483년 우부승지에 올랐으며, 이어서 좌부승지·이조참판·예문관제학·병조참판·홍문관제학·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로부터 수학, 후일 사림의 조종이 된 그는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으며, 특히 1486년에는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을 편차(編次)한 사실만 보더라도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들이 소실되었으므로 그의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으로서 사초에 수록,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그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정몽주·길재 및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도학사상은 그의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이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켜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이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적 성격을 지닌 것이기 때문에 이를 높이 평가하였던 때문이다.

세조·성종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 실천하였는데, 이와같은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이들 사림들이 당시 훈척계열(勳戚系列)에 의하여 빚어지는 비리와 비도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에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생전에 써둔 〈조의제문〉으로 빚어진 일이라 그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으며, 밀양의 예림서원(藝林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김천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 遊頭流錄》·《청구풍아 靑丘風雅》·《당후일기 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 一善誌》·《이존록 #이23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많은 저술들이 무오사화 때 소실된 관계로 지금 전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한때 문간(文簡)으로 바뀌었다가 숙종 때에 다시 환원되었다.

참고문헌 : 世宗實錄, 成宗實錄, 燕山君日記

 

사초(史草) : 공식적 역사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

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실록 편찬의 자료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관이 직무상 개별적으로 비밀히 작성한 국정 기록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때로는 그때그때의 국가 정사[時政]에 대한 기록을 모은 시정기를 뜻하였으며, 넓게는 실록 편찬의 모든 자료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도 국가 역사가 편찬되었으므로 그 자료가 되는 넓은 의미의 사초가 있었겠지만 제도화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초기에 사관(史館:春秋館)이 설치되어 실무자인 직사관(直史館) 4명이 시정기를 작성하게 되어 있었으나 자세한 사정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춘추관의 사관이 작성한 기록을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한다는 점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였으나, 고려 귀족제 사회가 극복되고 관료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역사편찬과 사초의 의미가 더욱 중요해졌다. 춘추관 관원은 모두 겸직이었으며, 실질적으로 예문관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 등 평상시의 사관이 역사 자료를 기록하였다.

 

좁은 의미의 사초는 봉교 이하 8명의 사관이 교대로 궁중에 숙직하면서 조정의 모든 행사와 회의에 참여하여 정사의 잘잘못과 국왕의 언동, 인물의 선악 등을 일정한 형식을 따라 기록한 것이다.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임금이 죽은 후 정해진 시간 내에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개별적으로 보관하였다.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의 공문서를 사관이 종합정리한 것으로서, 매달 1책 또는 그 이상으로 묶어 춘추관에 보관하였다. 사초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국왕을 포함한 누구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새 국왕이 즉위하여 선왕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 춘추관에 모아 자료로 이용하였으며 작업이 끝나면 실록 초고본들과 함께 물에 풀어 기록을 없애고 종이를 재생하였다(洗草).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국정의 모든 일이 기록되어 역사편찬의 자료가 된다는 점은 기록과 평가의 집중적인 대상이 되던 국왕에게 현실적으로 큰 제약을 가했을 것이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사족들의 권한 강화는 강력한 언론권과 더불어 이 제도에 힘입은 바 크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에 국왕의 정사는 승정원 가주서와 예문관 검열이라는 복수기관, 복수인물에 의해 기록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초를 작성하기 위해 사관은 국왕에게 올라오는 모든 소차와 장계를 먼저 볼 수 있었으며 왕의 비답이 내려진 정부 행정의 모든 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다.

 

현종이 언관과 벌인 극단적인 대립 상황을 기록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을 때 예문관 검열은 즉석에서 왕명의 부당함을 밝히고 그 명령을 둘러싼 논란까지 모두 기록하였다. 그러한 기록들이 모두 사초가 되었다. 정치적 의미가 지대하였으므로 연산군대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날 때는 김종직(金宗直)이 작성한 사초가 결정적인 빌미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때의 연산군마저도 다만 문제되는 부분만을 뽑아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계유정난 (癸酉靖難) : 1453년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원로대신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명을 살해·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1453년(단종 1)에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원로대신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수십명을 살해·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 1452년 5월에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게 되면 궁중에서는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后妃)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예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시 궁중 사정이 그렇지 못하여 모든 정치적 권력을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인 황보인·김종서 등이 잡고 국왕보필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세종과 소현왕후 사이에 출생한 적자는 문종 외에 수양·안평(安平)·임영(臨瀛)·광평(廣平)·금성(錦城)·평원(平原)·영용(永庸)의 일곱 대군이 있었다. 그 중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이 서로 세력경쟁을 벌였다.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수양대군이 거사를 계획한 때는 단종이 즉위하고 2개월이 지난 그 해 7월 무렵으로, 이 때부터 수양대군은 실제로 대권에 야심을 품고서 권람(權擥)·홍윤성(洪允成)·한명회(韓明澮) 등을 심복으로 만들고 있었다. 수양대군의 거사계획은 그가 1453년 4월 명나라에서 돌아오자 급진전되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고, 심복무사들을 양성하여 마침내 10월 10일 거사를 단행하여 김종서 등 정적들을 제거하였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2년 뒤에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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