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고향
김 익 택
황토길 오솔길은
검은 아스팔트로
두 마지기 감자 밭은
공장의 앞마당으로 변신했고요
물 좋은 상답은 묵은 지 몇 해
산 갈대와 갯버들만 무성합니다
두꺼비집 짓고 놀던
개울가 모래톱은
시멘트 옹벽에 묻히고
지천으로 뛰어 다니던
개구리 메뚜기는
농약으로 사라지고
돌아가는 골목마다
아이들 소리 멈춘었고요
집집마다 늙은 이 뿐
사연 많던 돌담들은
흔적도 없습니다
아늑했던 기와집은 전설 속 얘기고요
마을을 지켜주던
당산나무마저 사라진 지 오래
변치 않는 것이 있다면
앞산과 뒷산
고향 찾는 사람들 기억 속에는
있어도 없는 풍경
전설 같은 추억 뿐입니다
그곳 마을 사람들
김 익 택
그곳
마을은
계곡의 둔덕에 누워
안개를 먹고 이슬을 먹고 자란다
그곳
산골짜기
계곡의 물은
바위와 바위에 무수히 부딪혀
숲을 머금고 바람을 머금어서 흘러가고
그곳
바람은
나무와 숲을 헤치며
햇빛을 실어 오곡을 익게 하고
그곳
마을 사람들은
산을 닮고
숲을 닮고 바람을 닮아서
人情을 나누며 두터운 덕으로 산다
김 익 택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상황
꼭 거처야 할 삶이 있다
얼굴의 여드름처럼 설레는 청춘도 있고
발바닥의 무좀처럼 귀찮고 괴로운 전염병도 있다
본의 아니게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일도 있다
너무 편하고 친한 사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뱉은 말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
외면하고 싶은 사건과 일들
모른다고 무시하고
흉하다고 외면하고
그랬던 삶
그 삶이 어느 날 남의 일이 아닐 때
낳아 준 부모 조상 혹은 하느님에게
온갖 이유를 끌어들여 항변하다 절망한다
사랑과 행복 아쉽지 않는 삶
누릴 수 있는 권한만 있는 것처럼
구차한 아픔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은 남의 것
외면 하고 싶은
우울한 어느 날 하루
김 익 택
초겨울 추위처럼 마음이 스산할 때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우울 할 때가 있지
그때 마음은
쭈그러진 채 벽에 걸린 빈 망태기 같고
겨울 밭에 홀로선 메마른 수수깡 같다
사랑을 위한 사랑은 없고
외톨이 아닌 외톨이가 된 외로움
그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발견할 때
마음의 행로를 놓쳐버린
낙오자가 된 기분일 때가 있지
누군가 등 뒤에서 흉을 볼 때
좀 더 뻔뻔스러울 수는 없을까
아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죄 지은 것도 아닌데
용기는 유능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고
행복도 부유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닌데
우울한 어느 날의 하루
나는 가끔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지
작은 연못에서의 꿈
김 익 택
어릴 적
우리 집 마당 끝에
작은 연못 하나 있었지
그 작은 연못에 바람이 일면
늘어진 수양버드나무 가지가 밑 그림을 그리고
가지런한 물결 위에는 구름도 놀다 가고
산 그림자도 놀다 갔지
은빛
물결 속의 붕어는
연 잎 그늘에서 쉬기도 하고
수초 줄기에 매달린 고동은
그네를 타고 놀았지
가끔 청개구리는 연 잎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짝을 지은 왕 잠자리 멱을 감고 놀았지
외롭고
심심했던 나는
물푸레나무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연 꽃을 세고 잠자리를 세다
눈이 시려 하늘을 보곤 했지
언제나
아득했던 미래의 꿈
구름 위의 세상은
궁금하면 궁금한 만큼 두렵고 아름다웠지
이 세상의 제일 큰 부자가 되어서
갖고 싶은 것 다 가져보고
나쁜 사람 벌주는 판사가 되고 싶고
천하를 호령하는 장군도 되고 싶고
불쌍한 사람들 다 도와주는 좋은 사람 되고 싶었지
그리고 또
세상에서 제일 예쁜···
ㅎㅎ
잠결인가 꿈인가
누군가 자꾸 부르는 소리에 일어났을 때는
밥 먹으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
꿈은 뿌듯한데
한낮의 태양이 걸어가는 내 어깨를 무겁게 했지
땅이 전하는 말
김 익 택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도리가 있듯
사람과 자연 사이에는 순리가 있죠
당신들은 이 땅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손님일 뿐
지금 소유하고 있다고 해서 영원한 주인은 아닙니다
나를 아끼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
너를 위한 관심과 너를 위한 배려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제 자식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정성 아니어도
가끔 고마운 마음 가졌으면
욕심 아닌 관심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물며 사람은 만물의 영장인데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척 하면 안되지요
베푼 만큼 거둔 큼 사랑하고 가꾸고 보살피는
보답은 못하더라도
원망 실망 안 못한다고 무시하진 마세요
기본 상식 기본 윤리 잊고 살면
나에게 돌아 온다는 사실 자연의 진리 입니다
당산나무가 마을에 있는 이유
김 익 택
마을 앞 당산나무는
누구에게나 속마음을 드러내 놓는다
해 돋고 바람 불고 비 오고 눈 오는
자연에게는 말 없는 순응을
사람에게는 휴식을 곤충들에게는 보금자리를
수백 년을 내가 아닌 너를 위해 살아왔던 삶
주기만 했지 바라는 것 없다
소원 하나 있다면
돌로 때리고 발로 차고 가지를 찢고
잎을 마구 훑는 것 하지 말고
편하게 놀다 가는 것
이 땅에 모든 생명들
아프다 말하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만 있다고 감정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것 아니다
고마움을 늘 잊고 사는 공기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너무 편해서 소홀한 존재지만
사랑하고 아끼는 맘 고향 떠난 사람 못지 않으리라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믿음 아니듯
마을이 생기고부터 함께한 세월
지금 아이들 그 역사 몰라도 당산나무는 알고 있다
그 옛날 소학 외고 명심보감 외우던 아이들처럼
삶의 윤리 터득한 서당 개 3년 아니지
정이 있고 믿음
있다면
변치 않는 의리 있다면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빛 바랜 책 한 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산나무 아닐까
그의 품에서
천자문을 외우던 아이 피리 불던 청년
영어 단어 외우던 아이 기타 치던 청년
피아노 치던 아이
스마트 폰으로 정보를 검색하는
아득한 세월부터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이 잊고 기억 못하는 그 세월에도
그의 품속엔 수 세대 걸쳐 내려온 마을의 이야기가 있지
그의 품속에서 사람들이 떠나가고 사람들이 돌아오고
사람들이 죽고 새 생명이 태어났지
앞으로 또 얼마나 마을을 지켜 보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만으로
마을의 가장 같은 존재
더 넓은 그늘 만큼이나
아량을 가진 존재라는 것
그가 마을에 있는 이유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