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사원 방문 소회

 

김 익 택

 

 

 

솔 향기 더 짙고 연초록 버들잎이

꽃보다 아름다운 날

신남서원가 검은 골기를 전신욕을 하려는 듯

초록 봄 햇살이 가득하다

오래되어 모르고 관심 없어 몰랐던

옛날 박위장군 참 모습

오늘 알게 된 나그네는

참으로 부끄럽지 아니 할 수 없다

일찌기 김해분산성 부산 동래성을 축조하여

왜구 침입에 대비했고

대마도 정벌 때

함선100척을 이끌고 왜선 300척을 전멸시킨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해군은

우리나라 최초 잠수함 이름이 박위함이 명명했으니

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신라시대 장보고장군

고려시대 박위장군

조선시대 이순신장군의 정신이

백년 천년으로 이어져 귀감이 되었면 하는 바람이다

 

신남서원 방문 소회 2

 

김 익 택

 

 

 

 

 

늦게 찾아온 나그네를 사양하는 양

대문은 닫혀져 있어 들어 갈 수 없어

돌 담장 따라 서원안을 구경 하려는데

담장이 높아 그것마저 허용치 않네

담 밖에서 서원 안을 기웃거리다

오해받기 십상이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기 아쉬워

돌담을 따라가면서 서원 안을 훔쳐봤다

찾는 이 없어 소홀 한 것일까

대문입구 안내판에 장군의 행적 없으면

어느 양반 대가 집같이 소박하다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으면 생각

좀더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생각

돌아오는 동안 내내

그 생각이 뇌리에 떠나지 않았다

 

분산성 용

 

김 익 택

 

 

 

 

 

 

김해 평야를 품고

낙동강 조율하는

분산성은

태평양을 향해

비상하는 한 마리의 용

중국의 이무기가

낙동강으로 침입할까

박위장군 부럽 뜬 눈

일본 이리때 김해평야를 약탈할까

똬리를 틀고

밤 낮으로 지키고 있다

 

신남서원 소개

무안면 정곡리에 있는 신남서원(莘南書院)은 고려 말기 대마도정벌과,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威化島) 회군에 공을 세운 정국군 박위위(靖國軍 朴威)와 조선 초기 문신인 소총재(小塚齋) 박기(朴耆) 부자를 향사하는 서원이다. 밀성박씨 정국군파 종중 소유로 종중에서 관리한다.

신남서원은 순조 22년(1822)에 후손인 박성기(朴聖基)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士林)의 공론을 모아 창건 하였다. 서원내 사당을 “상모사(尙慕祠)”, 강당을 “경보당(景報堂)”이라 하며, 당시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은 응교 강세백(應敎 姜世白)이 지었다. 이 서원의 주향으로 모셔져 있는 박위(朴威)장군은 고려 우왕때 김해부사(金海府使)로서 여러번 왜구를 격파했고, 우왕 14년에는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의 직책으로 전선(戰船) 100여척을 인솔하여 이종무(李從茂) 이후 대대적으로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300여척의 왜선(倭船)을 불태우는 등 대승을 거두었다. 1994년 우리 손으로 네 번째 건조된 잠수함(潛水艦)에 이 박위(朴威)장군의 이름을 빌어 “박위함(朴威艦)”으로 명명(命名)되기도 했다.

고종 5년(1868)에 내려진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철거 되었으나 후손들은 서원 강당의 당호를 경보당으로 바꾸고 재실(齋室)로 삼아 이곳에서 박위 장군을 주향(主享), 박기를 배향(配享)으로 향사를 올렸다. 1981년에는 후손들의 발의와 고을 유림들의 호응으로 상모사(尙慕祠)를 이전대로 중건하였다. 현재 서원의 배치는 사당인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神門)을 설치하여 신역(神域)을 구분하였으며, 사당 밖에는 강당인 경보당이 있다. 경보당은 견치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지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평면은 가운데 삼칸 대청을 두고 그 좌우에 온돌방을 들인 형식이며, 대청 앞은 개방하고, 온돌 앞에는 두 짝의 띠살창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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