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라트 주 수라트 시 밤 문화 2
인구 백오십만이 넘는 구자라트주 수라트 시
일요일만 되면
가족 연인 학생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데모를 하러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왕복4차선 양 옆에 보도볼록 높이 30센티 넓이 3미터에서 4미터 길이는 약5킬로미터
여기에 사람이 모여들어 양탄자를 갈아놓고 담소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노는 것이다.
강변도 아니요, 공원도 아닌 4차선도로에 먼지 폴폴 날리며 오토바이 자동차 인력거 우마차등....
양쪽 길옆 가장자리에 모여들어 하룻밤 피서같이 놀다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어린아이를 데리고....
술 취한 사람들은 없었고 고성방가 싸우는 것 보지 못했고 노래하는 사람도 없었다.
보도 블록에 앉아 조용히 담소 나누며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한결 같이 즐거워보였고 행복해보였다.
사진찍는데 도움을 주신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한다.
아래 시진들은
그 첫번째로 아이와 부모 사진을 모아서 올린 사진들이다.
앞으로 시리즈로 계속올릴 예정이다.
맨 아래 수리트 시 간단한 정보 참조 하시기 바랍니다.
인도 중서부 구자라트 주 남동부에 있는 도시.
탑티 강과 캄베이 만 어귀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1516년 고피 저수지를 건설한 고피라는 바라문이 세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지역을 수라지푸르 또는 수리아푸르라고 명명했으나 1520년에 수라트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12세기와 15세기에 이슬람교도들에게 약탈당했다. 1514년 포르투갈 여행가인 두아르테 바르보사가 남긴 기록을 보면 수라트는 중요한 항구로 표현되어 있다. 1512년과 1530년 포르투갈인들의 방화로 불탔고 1573년 무굴 제국에 정복되었으며 17세기에는 마라타족의 왕 시바지에게 2번이나 침략당했다. 그후 옷감과 금을 수출하는 인도의 상업중심지가 되었으며 직조업과 조선업 등 공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612년 영국인들이 최초의 인도 교역소를 세웠다.
18세기를 지나면서 수라트 시는 차츰 쇠퇴해갔다. 영국과 네덜란드 양쪽에서 통치권을 주장했으나 1800년 영국인에게 지배권이 넘어갔다. 19세기 중엽에는 주민수가 8만 명밖에 되지 않는 침체된 도시였으나 인도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고운 모슬린을 제조하는 고대의 기법이 다시 살아났고 면화, 명주, 비단, 금·은 제품이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밖의 공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여러 교육기관이 있으며 간선도로와 서부철도가 지난다. 주변지역에서는 집약농경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목화·기장·콩류·쌀 등을 주로 생산한다.
수라트 시는 섬유 제조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인구 : 시 1,496,943(1991), 대도시권 1,517,076(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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