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성과 도화
김 익 택
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정신속에 살아 있는
민족의 얼
나라 사랑하는 정신 변치 않듯
성성하던 그 옛날 군사들의 용맹 흔적 없고
탄탄했던 성벽 비바람의 세월에 허물어져도
노병의 형형한 눈 빛이 같이 가슴이 뭉클하다
성 어깨에 기대어 활짝 핀 도화가
시대를 초월한 늙지 않는 정신
도원의 결이 같이
세계를 뻗어가는 오늘 날 신세대의 젊음이같이
그 옛날 나라위해 잠들은 그분들을 위로하듯
화사하게 피어 있다
나를 위한 위로
김 익 택
고개를 숙이지 말아요
그대 잘 못 아니예요
모두다 내 맘대로 내 생각대로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지옥이지요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이상을 실현할 수 없고 실현한다 해도
계속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삶이지요
기다림 인내는 삶의 필수적이고
행복은 가뭄 끝에 단비같은 것이지요
불행을 알아야 참 사랑을 아는 것이지요
그러니 힘들고 외롭다고
고개 숙이지 말아요
그대 잘못 아니예요
좋든 싫든 내 삶일 뿐
사랑하며 살아도 모자라는 것이 삶이니까요
원망을 해도 조금만 하고
슬퍼도 조금만 슬퍼해요
말 같이 잘 안되겠지만 생각이 실천을 하게 되고
실천이 습관이 되는 것이 또 삶이지요
분산성의 돌 하나하나는
김 익 택
하나가 모여 둘이 되고 둘이 모여
나를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단단한 믿음이 되기까지
분산성의 돌 하나하나는
소리 없다고 외침 없는 것 아니고
평화롭다고 전쟁 없는 것 아니었다
성을 쌓고 성을 보수한 천년 동안
적의 침입에 죽음을 마다 않고 싸웠던
군인들과 민초들의 피와 땀과
죽음의 생생한 현장이다
돌 하나하나의 평화 돌 하나하나의 소망
돌 하나하나의 아픔 돌 하나하나의 눈물
돌 하나하나의 믿음이 지켜낸 정신이며 희망이다
아름답다고 좋아하고 즐겁게 거니는
그 길은
미래 후손들을 위해
꿈과 희망을 죽음으로 바꾼
조상님들의 원이며 희망이며 얼이
숨쉬는 곳이다
분산성의 허황후 노을
김 닉 택
그 옛날 허황후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봤을
노을 빛이
저와 같았을까
분산성에 돌 하나하나 마다
붉은 노을이
아름답다 못해 정겨운데
봄바람에 사위는 저녁 노을이
고요히
가야의 대지를 품고 있다
수신불가 편지
김 익 택
시공간을 뛰어 넘는 디지털 시대에
원시적인 방법으로 밖에 얘기할 수 없는 것은
확신할 수 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한시도 급한 그대 사랑 확인을
달 없는 낮에는 해에게
해 없는 밤에는 별에게 보내는 편지는
송신불가 수신불가이지만
하지만 내가 모르는 그 어떤 텔레파시가
그대 받아 볼 수 있을까 기대 저버리지 못합니다
사랑해도 전할 수 없고 기적 아니면
전 할 수 없는 그대 향한 맘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성이 모자랄까 관심이 무뎌질까
내나 나를 용서서 하지 못해
허구같은 사실
써도 보이지 않고 말해도 들리지 않지만
사랑이 넘쳐흘러
정성과 그리움은 가슴으로도 담을 수 없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며 그리움이 무엇인지 정리하지 못하고
마음이 정성을 뛰어넘으면 닿을 수 있을까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하는 맘으로 보냅니다
그대가 나 아닌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고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나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홀로 사랑은 늘 불안한 아픔인데
잊지 못하고 끊지 못하는 내가 나를 미워합니다
김해분산성
金海盆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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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시대 에 축조되어 조선시대까지 이용된 석축 성곽. 산성. 사적.
개설
김해 동북쪽에 위치한 해발 330m의 분산(盆山) 정상부를 감싼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남쪽으로는 김해평야, 서쪽으로는 김해 시가지와 양동산성(良洞山城), 그 뒤로는 창원 쪽이 한 눈에 보인다. 산성의 대부분은 돌로 쌓은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서남쪽의 험준한 지역은 뾰족하게 솟은 자연암반을 성벽으로 이용하였다.
역사적 변천
분산성에 대한 기록은 여럿 전한다. 곧『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석축으로 둘레가 1,560척이나 지금은 퇴락하였고, 성내에 우물이 둘인데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고,「정몽주기문(鄭夢周記文)」에는 박위(朴蔿, ?∼1398)가 김해로 내려와 왜적에 대비하여 분산성을 고쳐 쌓으면서 크게 확장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분산성 안에는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건립한「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蔿築城事蹟碑)」가 있는데, 이에 의하면 조선 초에 박위가 옛 산성에 의거하여 보완해 쌓은 뒤 임진왜란 때 허물어진 것을 1871년(고종 8)에 다시 현재의 성벽으로 고쳐 쌓았다고 한다. 분산성은 조선 초기 이전에 이미 축조되었고, 몇 차례 보완되었던 셈이다.
하지만 축성 방법이나 출토 유물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고쳐 쌓으면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여러 차례에 걸쳐 대대적인 수축과 개축이 이루어졌고, 1871년에 다시 쌓은 성벽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내용
수직에 가까운 성벽은 높이가 3∼4m 가량 되는데, 무너진 부분이 많지만 북쪽과 서쪽의 성벽은 잔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처음 성을 쌓았을 때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성벽은 축조 수법에 뚜렷한 차이가 있어 시기를 달리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곧 먼저 쌓은 성벽의 받침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이보다 3m 정도 들여 쌓아 또 다른 성벽을 축조한 모습이다. 먼저 쌓은 성벽은 길고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석을 ‘품(品)’자 쌓기로 쌓으면서 수평 줄눈을 맞추었고, 빈틈에는 잔돌을 끼워 넣었다. 아래부분에서는 받침 부분에 덧댄 보축(補築) 성벽도 확인된다. 보축 받침의 바깥쪽에는 적갈색 점토와 흑갈색 점토를 교대로 경사지게 다졌는데, 다짐층에서는 통일신라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는 기와 조각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5m 정도이고, 보축 받침은 높이 1.20m이며, 받침 부분의 너비는 1.6m이다.
뒤에 쌓은 성벽은 앞선 성벽에 사용된 성돌을 이용하거나 새로 가공한 성돌을‘품’자 쌓기로 올렸는데 앞선 성벽보다는 조잡한 편이다. 성벽은 2m 정도만 남아 있지만, 무너져 내린 석재로 보아 훨씬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뒤에 쌓은 성벽 안에서는 고려시대∼조선시대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당시에 고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성벽은 현재 높이 2.4m, 너비 4.3m 정도로 확인된다.
1998년 지표조사와 2002년 분산성 복원공사 때 실시된 일부 성벽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북문터와 남문터, 암문, 봉수대, 건물터 4곳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남문터는 성문의 축조 방법까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 동북쪽에 있는 북문터는 너비 2m 정도로, 성문 또는 문루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북문터와 암문의 앞쪽에는 돌로 쌓은 너비 5m, 길이 3m, 높이 1m 정도의 적대시설도 있는데, 적대시설은 암문에서도 확인된다.
특징
분산성 안에서는 시기를 달리하는 많은 양의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대부분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다. 특히 뒤에 쌓은 성벽의 안쪽 트렌치에서 출토된 유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것이 대부분이고, 성벽 바깥쪽에서 수습된 기와들은 통일신라시대 이전의 것으로 보인다. 토기 조각은 통일신라시대 주름무늬 병과 물결무늬 큰 항아리 조각, 고려시대 문살무늬 큰 항아리의 아가리 및 몸통 부분 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의 도기 조각과 분청사기 일부도 발견되었다.
한편 보완하여 쌓은 성벽 받침돌의 아랫부분에서는 원삼국시대 초기의 민무늬 토기와 일본 야요이계 토기, 그리고 삼국시대 경질토기와 적갈색 연질토기도 상당량 수습되었다. 이것은 분산성 축성 이전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분산성이 처음 축성된 시기를 삼국시대까지 올릴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대동지지』의 지도에 의하면, 1871년에 증축한 성벽의 둘레는 조선 초기의 1,560척에 비하여 4배 정도 확대된 6,126척(1,021보)에 달한다. 성벽에는 동문, 북문, 서문이 있는데 모두 누각를 올렸고 남문은 암문으로 만들었다. 성 안에는 2곳의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북쪽 봉우리에는 은해사가 있고 남쪽 봉우리에는 진아(陣衙)와 창고, 군기고(軍器庫)를 두었다. 그 아래에는 염고(鹽庫)와 탄고(炭庫), 대동고를 설치하였다. 성의 남서쪽에는 봉수대가 있으며, 우물은 성의 북쪽과 가운데에 4곳이 있고, 연못은 동문과 남쪽 암문 사이에 위치하였다. 이 지도에는 읍성과 서문을 연결하는 길이 나 있어, 읍성과 분산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의와 평가
분산성은 축성 기법과 출토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뒤 통일신라시대∼조선시대 말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고쳐 쌓거나 확장한 산성이다. 특히 돌로 쌓은 성곽의 축성 기법이 변화하는 모습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산성이다. 또한 김해평야, 김해 시가지, 낙동강 하류와 남해안 일대가 한 눈에 조망되는 수륙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해안 방어체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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