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의 미학
김 익 택
그대 품격은
한국 여성미의 모럴
안방 앞 화단에선
정부인이 되고
장독에서 피면
어머니가 되었지요
화려하지 않지만
깊은 멋이 있고
진하지 않지만
결코 가볍지 않는
엷은 향기는
한국의 정같이
필요충분했지요
붉은 모란꽃 속은
김 익 택
길 떠나는 남편
아내의 입다문 울음같이
아들 손 꼭 잡고
군 보내는 어미 맘같이
보듬은 붉은 정성
가슴을 아리게 한다
모란 피는 봄날은
김 익 택
그대 피는 봄날은
온 집안이 아늑했지요
남정네는 헛기침을 하며
봄을 실감했고
아낙네는 아름답다며
호들갑을 떨었지요
풍성한 붉은 꽃은
겨울의 끝 삭막한 집안 환경을 바꾸었고
노란 꽃술은
움츠렸던 가족들 가슴을 열어주었지요
찾아오는 벌 나비는
귀한 손님 방문 다름없이
생기를 돋구었고요
숙녀 치마 저고리의 수놓은 모란꽃은
뭇 남성 가슴을 흔들어 놓았지요
첫사랑 희망고문
김 익 택
저 엷은 초록잎 사이
모란꽃이 추억을 불러내는 날은
가슴이 답답하다
사랑이라 말해도 좋고
그리움이라 해도 좋은
설레는 말 첫 사랑
누구는 아름답다 말을 해도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아픈 희망고문
단한번도
그녀가 나를 슬프게 하지 않고
아프게 하지 않아도
내 이룰 수 없는 모자람이
내가 나를 실망하고
내가 나를 질책하는 사랑고문은
초조하도 불안하고 우울했지요
사월의 마지막 이별
김 익 택
내 사랑 내 곁에
바이올린 선율을 타고
울고 있네요
창 밖엔 비가 내리고
벚꽃이 떨어지고 있네요
사랑의 노래인가요
이별의 노래인가요
뚝뚝
벚꽃 잎에 맺힌 비가 대신 울어주네요
기다리던 별의 소식은 들을 수 없고
빗줄기가 아스팔트에 자폭하고 있네요
노란 우산을 쓴 아가씨
바람과 힘 겨루기 하고 있네요
비가 먹구름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나 봅니다
우르르쾅쾅
천둥이 창문을 두드리네요
지지직
번갯불이 방안을 스캔하네요
갑자기 불이 커지고
온 세상이 캄캄하네요
신록의 충고
김 익 택
눈만 뜨면 보이는
전 산의 신록이 말을 건넨다
바쁘게 살고 열심히 산
너 가슴의 산에 신록 들여다 보라고
꽃이 피고 잎이 피고 푸르기까지
얼마나 외로웠는지
너도 하나의
나무일 수도 있다는 것
꽃이 피고 잎이 피고 열매 맺는 동안
내 의지와 관계없이 온갖 시련
봄은 그냥 봄 아니었고
겨울은 그냥 겨울 아니었다는 것
다만 말없이 소리 없이
소화시키고 숙성시켜
몸에 보이지 않는 해로운 탄소
몸에 보이지 않는 이로운 산소
좋은 것만 되돌려주었다는 사실을
오늘 하루
김 익 택
오늘 하루
햇살이
시간을 갉아먹는 동안
바람이 빈둥빈둥
나무 잎을 희롱한다
어제 온 대지를 적셨던
눈물은
간데 온데 없고
푸른 잡초가 상큼한 윙크를 한다
모란꽃의 겸손
김 익 택
신혼 방 이부자리 붉은
흔적 같은 꽃이여
가여운 바람에도 흐느적거리고
부드러운 보슬비에 고개 숙이는
그 속내
사랑하는 사람 밖에 모르고
숨소리 밖에 모르는 순정 뿐인데
이른 아침 남몰래
흐느낌으로 피어서
대낮 고개 숙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꽃이여
행복은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일
아니라서 저렇게 겸손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