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릉의 봄 풍경



김 익 택




 

 

 

고궁처럼

사원처럼

공원처럼

누구나 관람하고 산책하는

수로왕릉은


그 옛날 그 분이

아유타 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듯이


언어가 다르고

피부가 다르고

국적이 다른

인도 베트남 네팔 중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인들이

그분의 넓은 품에서

편안하게 반나절을 즐기고 있다


어떤 가족은 

유모차를 끌고 가고 

어느 분은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누구는 

홀로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또 어떤 연인은 

두 손 꼳 잡고  데이트를 하고


한결같이 

미소밖에 없는 

그들을 보고 있으면

포용 그 낱말이

새삼 거룩하고 아름답다

 

 
































































































김해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 신화


가락국의 수로왕 탄강 설화에 대해서 자세히 전하고 있는 것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지가 개벽한 후에 이 땅에는 나라의 이름이 없었고, 또한 임금과 신하라는 칭호도 없었다. 옛날에 구간(九干)이 있어 이들이 백성을 다스렸으니 1백호에 7만 5천인이었다. 때마침 후한(後漢) 세조(世祖)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 임인(壬寅) 3월 계유에 구지봉(龜旨峰)에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척이 있어 구간 등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수로왕영정

그러자 하늘에서, “하늘이 내게 명하여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시므로 여기에 왔으니 너희는 이 봉우리의 흙을 파면서 노래하고 춤추어라.” 라는 말이 들려왔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 구간 등이 구지가(龜旨歌)를 부르고 춤추었다.

그러자 곧 하늘에서 자색(紫色) 줄이 드리워 땅에 닿았는데, 줄 끝에는 붉은 폭(幅)에 금합(金合)이 싸여 있어 열어 보니 해와 같이 둥근 황금 알 여섯 개가 있었다. 다음날 새벽에 알 6개가 화하여 사내아이로 되었는데 용모가 매우 깨끗하였다. 이내 평상 위에 앉히고 여러 사람이 축하하는 절을 하고 공경을 다하였다.

그 달 보름에 모두 왕위에 올랐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휘(諱)를 수로(首露)라 하고 혹은 수릉(首陵)이라 하였는데, 수로는 대가락(大駕洛)의 왕이 되고 나머지 5인도 각기 5가야의 임금이 되었다.

수로왕의 탄강 설화는 김해 가락국의 건국신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설화는 전승과정에서 많은 윤색이 이루어지는데, 당대인의 역사 인식에 따라 가공의 사실이 첨가되기도 합니다. 서기 42년에 가락국이 건국되었다거나 또는 수로왕이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고 하는 것을 그 시대의 역사 사실로 볼 수는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수로왕 탄강 설화는 연구 분야에 따라서 천손강림 설화, 농경 사회의 전통 내지는 민속의례, 즉위의례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에 있는 고대인들의 사상과 역사적 배경 등 보다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이 내용 가운데 수로설화의 성격을 가장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은 ‘붉은 폭(幅)에 둘러싸인 금합 속의 알이 하늘에서 산봉우리로 내려왔다’ 라고 하는 천손강림과 난생설화의 요소입니다.

우리 나라의 건국 신화에는 단군 신화 이래 대부분 천손강림(天孫降臨)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수로왕 설화 역시 높은 산봉우리인 구지봉에서 내려오는 등 전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배자는 이러한 관념을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하고, 일반민들로 하여금 그 지배를 신성하게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 또한 새(鳥)로 변신하는 능력이라든지 허왕후와의 결혼담은 지배자로서의 위용과 건국시조로서의 정당성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는 천강신화는 새로운 이주민 집단이 도래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수로왕은 단순히 한 개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진문물을 가지고 김해지역 또는 가야지역으로 이주한 선진집단인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이미 김해지역에는 토착집단이 있었는데, 9간이 이들 집단을 각각 대표하였습니다. 이들 토착집단과 수로집단이 결합하여 성립된 것이 가락국이었을 것입니다.

9간 세력은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하였을 것이고, 새로 도래해온 수로왕 집단은 선진적인 철기문화를 가진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 42년이라는 가락국의 성립연대는 역사사실의 일반적인 측면에서나 고고학적 자료의 검토를 통해 볼 때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수로왕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동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난생(卵生)설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알이 황금색이며 해처럼 둥글었다는 기록은 태양숭배사상의 흔적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수로왕이 천손이라는 관념은 선택된 사람이라는 후대 사람들의 생각이 투영된 결과로서, 자신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관념을 피지배층에게 내세워 현실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권력행사를 정당화, 합법화, 신성화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로왕 외에 5명의 왕이 난생하여 6가야를 이루었다고 하는 ‘6란설’은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 의하면 가야의 전신인 변한에는 12개의 국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가야지역에 선진철기문화를 소유한 집단이 나타날 무렵의 고고학적 현상 역시 『삼국유사』 '오가야 조' 에 보이는 가락국을 제외한 5개의 나라에 비정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6란설’은 후대의 ‘가야연맹체’ 관념에 의해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수로왕 탄강 설화에서는 이외에도 해양문화적인 요소도 담겨 있습니다. 천강설화의 요소인 하늘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는 일반적으로 북방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영적 바다동물인 거북(龜) 역시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어산불영 (魚山佛影)' 에는 ‘만어사(萬魚寺)는 옛날 아야사산(阿耶斯山)이다. 산 옆에 가라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해변으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그가 수로왕 이었다’ 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에서도 역시 가락국과 해양과의 관련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가락국이 가지고 있는 지리적인 입지조건과 또 철을 매개로 한 해상교역세력으로서 성격을 볼 때, 거북으로 표현되는 해양문화 역시 수로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수로왕의 성인 김씨와 관련된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큰 성씨(姓氏)가 김해 김씨(金海 金氏)입니다. 그 유래를 알아 볼 수 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왕력(王曆)의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습니다.

거등왕(居登王)은 아버지가 수로왕이고 어머니는 허왕후이다. 개황력(開皇曆)에는 성이 김씨이니 대개 나라의 세조가 금란(金卵)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수로왕은 임인 3월에 알에서 태어나 이 달에 즉위하여 158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금란에서 났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니 개황력에 실려있다.

이 두 글에서는 수로가 금알에서 났기 때문에 김씨가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이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 보입니다.

신라 사람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고 하여 金으로 성을 삼았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직계라고 하였으니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수로는 신라와 동일한 성씨이다.

중국의 ‘소호금천씨설’을 채용하여 신성성과 유구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개황력은 가야 멸망 이후 편찬된 것이고, 『김유신비문』 역시 7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두 가지 기원설 모두 가야 당대에 이루어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7세기 중반 이전에는 신라왕족과 마찬가지로 김씨성(金氏姓)이 칭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수로왕릉


== 개요 ==

사적 제73호.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93번길 26(서상동)에 있는 무덤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가락국(駕洛國)의 초대 국왕이며,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이 묻힌 능이라고 한다. 원형 봉토무덤으로 높이가 5m이며, 주위 1만 8천여 평이 왕릉(무덤) 왕릉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도보 20분내 거리에 수로왕비릉, 국립김해박물관, 김해여객터미널 등이 위치해있다.


왕릉 구역 안에는 수로왕의 위패를 모신 숭선전(崇善殿)과 안향각·전사청·제기고·납릉정문·숭재·동재·서재·신도비각·홍살문·숭화문 등의 건물들과 신도비·문무인석·마양호석·공적비 등의 석조물들이 있다. 원래는 봉분 이외에 아무런 시설도 없는 원형 토분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왕의 격에 맞추어 시설들을 추가하였다.


== 상세 ==
수로왕 이야기는 『삼국유사』의「가락국기」에 전하지만, 무덤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본 무덤이 수로왕이 묻힌 곳이 아니라는 설도 있으나, 많은 학자들은 적어도 본 무덤이 [[삼국유사]]에 수로왕릉이라고 기록된 그 무덤임은 확실하다고 본다.

금관가야 멸망 이후에도 신라를 거쳐 고려 문종(고려)문종대까지는 비교적 능의 보존상태가 좋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조선 초기에는 많이 황폐해진 듯 하다. 『세종실록』에 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중심으로 사방 30보에 보호구역을 표시하는 돌을 세우고, 다시 세종대왕 28년(1446)에는 사방 100보에 표석을 세워 보호구역을 넓혔다는 기록이 있다. 무덤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춘 때는 선조 13년(1580) 수로왕의 후손인 허수가 수로왕비릉과 더불어 크게 정비 작업을 마친 후이다.

『지봉유설(芝峰類洩)』 기록에 따른다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지봉유설에 따르면 수로왕릉이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도굴을 당하여 내부가 드러났는데, 순장 당한 사람의 유해가 있었다고 한다.

=== 전설 ===
삼국유사 수로왕편에 따르면 수로왕릉을 함부로 건드린 사람들이 투탕카멘의 저주 온갖 횡액을 당했다고 한다. 도굴한 일본군도 횡액을 당했으려나? 예를 들자면 신라 말년에 아간 영규라는 사람이 멋대로 수로왕릉에 제사를 지낼 권한을 빼앗고 단오날 제사를 올리다가, 사당의 대들보가 까닭없이 무너지는 바람에 깔려 죽었다. 이에 영규의 상관이던 호족 충지가 수로왕의 영정을 그려놓고 경건히 제사를 지냈는데, 사흘도 채 못 되어 '''영정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땅바닥에 거의 한 말이나 흥건히 괴었다'''. 충지는 두려워 영정을 불태우고 수로왕의 후손들에게 다시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단오날 제사에 영규의 아들 준필이 또 다시 자기가 멋대로 제사를 올리려고, 후손들이 차려놓은 제수를 치워놓고 자기가 멋대로 제수를 차려서 제사를 지내다가 술잔을 다 올리기도 전 갑자기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 죽었다고 한다.

게다가 사당 내부에는 금옥이 많았다고 한다. 이를 노리고 들어온 도적들이 있었는데, 처음 시도에서는 웬 중무장한 갑옷무사가 사당 속에서 나타나 도적 일고여덟 명을 활로 쏘아 맞히자 도적들이 달아났다. 며칠 후 그들이 다시 왔을 때에는 길이가 30여 척이나 되는 거대한 구렁이가 사당 옆에서 나와 도적 여덟아홉 명을 물어 죽이자 도적들은 두려워하여 도망가 버렸다.

또한 고려 성종(고려)성종 11년(992)에는 김해부의 양전사(量田使) 토지를 측량하고 조사하는 관리. 조문선(趙文善)이란 사람이 수로왕릉에 딸린 밭이 너무 많으므로 줄이자고 요청하여, 조정에서 반려 끝에 절반을 김해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일이 끝나갈 무렵 조문선의 꿈속에 귀신 일고여덟 위가 나타났다. 귀신들은 조문선에게 큰 죄를 지었으므로 잡아 죽이겠다고 하며 칼과 밧줄로 고문을 가했다. 조문선은 꿈에서 깨어났으나 이내 병이 걸리는 바람에 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밤중에 급히 도망, 관문을 지나다가 이내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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