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길
김 익 택
저 닳고 닳은
바위 길의 이야기는 몇 짐이나 될까
제 몸보다 큰 짐을
등에 지고 가던 보부상들
과거 낙방하고 돌아가던 젊은 선비
한 숨소리 몇 짐이나 될까
누구는
아픈 팔다리를 질질 끌며 가고
누구는
가마를 타고 가고
사연 많고 시련 많은
발자국 없는
그 길은 몇 짐이나 될까
추심
김 익 택
전신주가 파란 가을 하늘을
생체기를 하고 있는 사이
휴식을 모르는 흰 구름이
대지의 들녘을 그늘로 시샘한다
이곳 저곳
더위를 떨쳐버린 꽃들은
활기를 되찾았고
꽃들의 향기에 취한 연인들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뒤따라오는 김 작가가 하는 말
하늘이 정말 파랗다
그 무덥던 더위는 어디 가고
하얀 구름이 여행 가방 생각나게 하네요
사심이 없는 가을은
잃어가고 있는 감성을
김삿갓 마음으로 돌려 세우는 가
목적지 없는 여행을 떠나고 싶다
생각 없는 하루
김 익 택
살다 보면
무엇을 하긴 해야 하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생각 없는 하루가 있다
몸은 굳어있고
마음은 공중에 떠있고
끝없이 울어 대는 참 매미 소리 같은
이명 소리만 뇌리에 가득한 하루가 있다
온 몸이 나른한
가을 한나절
빈 시간이 아까워
무심코 집어 든 책
김수영 시집이다
한여름인가
소매 짧은 흰 셔츠를 입고
오른 손등으로 볼을 괸 채
비스듬히 누워 어딘가 응시하고 있는
김수영 시인의 큰 눈망울이 날카롭다
김수영의 시인은
오늘 하루 같은 날을
“오오 사랑이 추방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 라고 말 했을까
저 어디
김수영시인의 눈빛이
생각 없는 하루를
직시하고 있는 것인지
생각 없이 무료함을 달래고 있는 것인지
늦은 가을 오후
무료한 더위가
무료한 생각이
무료한 시간이
나른한 더위보다 더 적막하다
서리 꽃
김 익 택
밤에 피고
아침에 지는 꽃은
너 혼자 뿐인가 보다
누가 무엇 때문에
얼마나 서럽고
가슴이 시려서
차갑게 더욱 차갑게
꽁꽁 얼어서
바싹 마른 갈 잎에
앙상한 나뭇가지에
비리 붙듯이
어두운 밤 몰래
하얗게 피워 놓고
아침 되면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