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서원 풍경

 

김 익 택

 

 

 

 

옆 강물 흐르는 강 언덕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선암서원

에워싼 소나무가

천년을 살아도 잃지 않는 기상인양

품격이 청춘이다

 

서당을 바라보고 있는 목 백일홍은

청빈 하게 살아온 기품같이

뒤틀린 나목이 용틀임하듯 힘차다

 

그 옛날 선비

충성과 위민 정신

마음것 펼치지 못했지만

귀향후

후학양성위해 세웠던 선암서원은

청도지방에 학문요람

 

현판에 빼곡히 적힌 한자

의미 모르지만    

소요정 일필휘지가

일자무식일지라도 힘이 느껴진다

 

 

선암서원의 향기

 

김 익 택

 

 

 

 

대문을 들어서자

골기와에 핀 하얀 버섯 꽃이

필통 꽃아 둔 붓처럼 꼿꼿하다

 

처마로 향해 곧게 뻗은

골기와 곡선은

고요해서 평화스럽고

자연스러워서 아름답다

 

서원에 들어서니

넓은 마루에 세월의 묵은 때가

그 옛날 선비의 체취인양 숙연하다

 

고개 들면 보이는 현판의 글들이

그 옛날 선비

일갈인양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선암서원을 거닐며

 

김 익 택

 

 

 

 

서원을 에워싼 돌 담장

비바람을 지켜온 기왓장

 

끄름이 잔뜩 묻은 부엌 아궁이

벽에 걸려있는 멍석

마루 구석에 뒤주와 백자

 

곳곳에 옛 삶을 엿볼 수 있는

고색 창연한 풍경이

잠시 타임머신을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다

 

글을 읽던 선암서원 실내에

빼곡히 쓰여 있는 현판 글들이

 

세월의 흐름의 무게

학문의 기품을

 

힘이 느껴지는 대문 입구 목백일홍은

시대의 기상을

 

여기 선암서원 아니면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그네 메마른 정신을 흥건히 적시고 남는다

 

 

선암서원 촌감

 

김 익 택

 

 

 

인간의 도리

삶의 의미

배우고 깨닫고자 공부했던 했던

묵은 기와집은

허기 진 진사처럼 서 있고

대낮 정적이 흐르는 뜰에는

끝물에 핀 백일홍 붉은 꽃이

서원을 보호하려는 듯

한껏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선암사원 백일홍

 

김 익 택

 

 

그대는 가고 발자국도 없는데

나는 그 자리를 쉬이 떠나지 못하네

그대 마음 모르지만

내 가슴에 오롯이 남은

설명 못할 아쉬움이 남아

둘러 보는데

눈에 박히는 빼곡한 한자

알아듣지 못한 얘기

뙤약볕 내리쬐는 풀어 놓고

돌아서는데

백일홍 나무 그늘이

좀 더 앉아 쉬어 가라는 듯 손짓을 한다

 

 

그분의 정신문화가

 

김 익 택

 

 

 

 

 

여기저기 허물어진 담장과 골기와가

세월속에 흐려진

그분의 정신문화처럼 보여 아쉬운데

 

무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세월이 던지 놓은 그분의 생의 의미가

내가 닮아야 하고 배워야하는 정신으로 느껴진다

 

그분이 가리키고자 했던 학문

그분이 지기고자 했던 도의가  

시공간을 뛰어 너머 내 얇은 정서를 울리고 있다

 

선암사원 노송에게 묻다

 

김 익 택

 

 

 

 

 

당파 정치 싸움이

싫어서

귀향한 이유라면

그 또한 의롭지 않는 일     

 

나그네 질문이

얼토당토 아니 하다면

저 현판의 글이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아

노송에게 물어본다

 

님이 걱정하시던 나라

2020년 지금 선진국

하실 말씀 듣고 싶다고

 

노송은 묵묵히 동창천을

바라보고 있고

동창천은 말없이 흐르고 있다

정의

경상북도 청도 지역에서 선현 제향과 교육을 위해 설치된 조선 시대 사립 교육 기관.

개설

서원 교육의 목적은 법성현(法聖賢)과 양이(養吏)의 두 가지이다. 서원의 교육 활동은 성리학을 그 학문적 기초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서원의 교육 목표는 곧 성리학의 교육 목표와 같았다.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에 내재된 천리(天理)를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이다. 따라서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법성현은 서원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교육 기관의 일반적 목적이었던 양이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서원은 원규(院規)에 양이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변천

청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생겨난 서원은 1518년(중종 13)에 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인 탁영 김일손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한 운계 서원이다. 운계 서원은 1661년(현종 2)에 자계 서원으로 사액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자계 서원은 후 1871년(고종 8)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동재와 서재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참봉 김용희가 중건한 것이다.

이후 조선 후기에 청도 전역에서 서원이 건립되었다. 이후 사회적 병폐의 원인 중 하나를 서원으로 지목한 흥선 대원군에 의해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전국 47개의 서원만을 두고 모두 철폐하게 되었는데, 청도 지역에서도 이 시기 많은 서원이 사라졌다가 이후 중건되거나 이건되었다.

청도의 서원 현황

청도 지역 현존하는 서원은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전에 건립된 서원과 1914년 이후 건립된 서원으로 구분되며, 지리적으로 이서면과 금천면에 집중되어있다.

서원 철폐령 이전에 건립된 서원으로는 자계 서원을 비롯하여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을 향사하기 위해 1577년에 건립되었다가 1868년 훼철된 후 1878년에 중건된 선암 서원, 1780년 충숙공 박익과 임진왜란 당시 14의사를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사원인 용강 서원이 있다. 또한 동계 이운룡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이서면 금촌리에 건립되었던 금호 서원이 있다. 금호 서원은 1871년 훼철된 후 강당만 현재 위치인 대월산 기슭으로 이건하였으며 1947년에는 이운룡의 후손과 유림들의 발의로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 또한 1844년 일청재 박호·모효재 박지현·경양재 박태고·죽옹 박중채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인 지산 서원, 1845년 건립되어 1972년에 중건한 두촌 박양무·화은 박계은·호재 박맹문·농암 박란을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훈령 서원, 1895년 충장공(忠壯公) 천만리(千萬里)를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황강 서원이 있다.

1914년 이후에 건립된 서원으로는 1914년 독선암 예인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의흥 예씨 재사인 율강 서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일등공신에 책록된 삼우정 박경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20년 건립한 임호 서원, 1932년 춘정 변계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밀양 변씨 재사인 봉양 서원이 있다. 또한 1946년 오졸재 박한주(朴漢柱)를 기리기 위해 설립한 석강 서원, 1977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향사하기 위해 건립한 학남 서원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사』(국사 편찬 위원회, 1977)

정만조, 『조선 시대 서원 연구』(집문당, 1997)

이수환, 『조선 후기 서원 연구』(일조각, 2001)

『경북 서원지』(한국 국학 진흥원, 2010)

『청도의 고 건축물』(청도군·한빛 문화재 연구원, 2011)

이우성, 「이퇴계와 서원 창설 운동」(『퇴계 학보』 19, 퇴계 학회, 1978)

정진영, 「예안 역동 서원의 연구」(『안동 문화 연구』 3, 안동 문화 연구회, 1989)

윤희구, 「조선 시대 서원 정책과 서원의 설립 실태」(『역사 학보』 181, 역사 학회, 2003)

김학원, 「한국 서원의 기원과 발달」(『열린 정신 인문학 연구』 10-2, 원광 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2009)

[네이버 지식백과] 서원 [書院]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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