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의 겨울풍경



 


병산서원에 대한 자세한 사료는

맨 아래 사진 출처

명쾌하고 자세한 자료를 옮겨 놓았으니 꼭 참조 바랍니다.


 

 

 

 

 

 

 

 

 

 

 

 

 

 

 

 

 

 

 

 

 

 

 

 

 

 

 

 

 

 


병산서원


     

살림집의 아름다움이 생활에서 시작한다면, 서원의 아름다움은 선학과 후학의 격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편하게만 지은 한옥이 좋은 집일 수 없듯이 격식에만 매달려서는 좋은 서원이 되지 못한다. 격식을 허물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짓기가 쉽지 않지만, 사적 제260호로 지정된 병산서원은 이런 점에서 매우 뛰어난 건축물이다. 격식을 지키면서 자연의 아름다움까지 담아낸 서원 건축의 백미를 만나 보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하회마을이 가까이 있어 병산서원 기행을 풍요롭게 한다. 하회마을에서는 탈놀이 공연 등을 즐길 수 있어 건축 기행을 문화 기행으로 이어 갈 수 있다.

자연 속에 녹아든 건축미

서원이 눈 속에 묻힌 탓일까? 병산서원에 도착하자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주름치마를 펼쳐 놓은 듯한 병산(屛山)이다. 낙동강과 절벽을 흔들며 내려앉는 눈송이들의 군무라니! 한 세기 만에 내린 폭설을 뚫고 오기에 바빴던 터라 차에서 내렸을 때 시야 속으로 부서져 내리는 눈발에 어우러진 풍광의 장대함이 보는 사람을 압도했다. 무사히 도착한 안도감에 긴장이 풀리며 세상은 잘 꾸며진 자연의 무대 위에서 마임처럼 차분하게 가슴으로 내려앉는다. 어떤 예술 건축이 이처럼 감동적일 수 있을까?

맨 처음 인간에게 건축을 가르친 것은 자연이다. 인류 초기 움집의 둥근 모양은 자연에서 제일 흔하게 만나는 디자인이다. 해도 달도 나무의 그루터기도 모두 둥글다. 둥지를 만드는 새와 곤충은 비록 미물이지만, 건축 역사에서만큼은 인간의 선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건축에서 자연은 늘 중요하다. 이는 동서양 모두에 해당되는 말로, 서양 건축의 화려한 출발점인 그리스 신전에서도 자연의 모습을 읽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양의 대표적 건축가인 가우디(Antoni Gaudí i Cornet)도 자연에서 건축의 모티프를 찾고는 했다. 하지만 서양의 건축물들은 자연에 동화되어 하나가 되기보다는 자연을 표방하여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가우디의 자연 건축 역시 그리스·로마·중세를 거치며 화려했던 그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반면 우리 전통 건축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때로는 슬며시 자연이 되어 버려 어디까지가 건축이고 어디까지가 자연인지 구분조차 힘들다. 사람들이 서원을 제쳐 두고 서원 앞에 우뚝 솟은 병산이 낙동강으로 눈을 툭툭 털어 내는 모습에 빠져든다 해도 그것이 병산서원의 건축미를 가볍게 하지는 않는다. 자연 속에 녹아든 병산서원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건물이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져야 하는지를 무언으로 보여 준다.

병산을 두르고 선 병산서원은 인공과 자연이 만나는 최적의 접점을 찾아냈다. 이것이 많은 이들에게 건축적 감동을 선사한다.

백 년 만의 폭설로 세상은 온통 소란스럽지만, 병산서원은 세상을 잊은 선비처럼 천연덕스럽다. 서원 앞에 군락을 이룬 배롱나무 역시 온통 눈꽃을 피우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간다. 떠나간 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 선현을 모시는 서원에 안성맞춤인 나무다. 관리인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특히 배롱나무를 좋아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류성룡과 함께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모신 곳이 병산서원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스물네 살에 벼슬을 시작하여 우의정까지 오른 류성룡은 국난을 내다보고 정읍 현감으로 있던 무명의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전라 좌수사에 천거한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이다. 그가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의 명운도 달라졌을 것이다. 배롱나무는 나목(裸木)으로 인식되어 여인이 머무는 안채 마당에는 심지 않았지만, 사내들에게는 속을 숨기지 않는 강직한 선비 정신을 의미했다. 이 나무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서원을 든든하게 지켜 온 병산과 함께 시류에 휩쓸리지 않던 결연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서원의 이름은 이 산의 이름에서 왔다고 한다.

병산서원의 슈퍼스타, 만대루

성리학의 비조인 주자(朱子, 1130~1200)의 스승 유자휘(劉子翬, 1101~1147)의 호가 병산(屛山)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병산서원의 명칭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류성룡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서원을 짓는 까닭은 두 가지다. 후학을 가르치는 것과 사당에 모신 스승의 제사를 지내는 것. 그래서 서원 공간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학생을 가르치는 강당 영역과 제사를 모시는 사당 영역이다. 서원 밖에서 강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외삼문(外三門), 강당에서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내삼문(內三門)이라고 하여 구분한다. 그리고 여기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인의 영역이 덧붙는다. 병산서원의 경우, 서비스 시설을 포함한 강당 영역은 고려 시대부터 유지되던 풍산 류씨 가문의 풍악서당이 1572년 풍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세워졌지만, 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7년에 다시 지어졌다. 사당 영역은 류성룡이 죽은 뒤 그의 제자 정경세, 이준 등이 1614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지어 류성룡의 위패를 안치하면서 조성되었다. 이후 만대루까지 들어서고 부대시설이 완성되면서 지금의 병산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은 철종 때인 1863년 사액서원(왕이 현판과 특혜를 주어 지정한 서원)이 되고, 1978년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병산서원 배치도

눈꽃을 피운 배롱나무가 병산서원으로 향하는 사람을 맞이한다. 서원에 다가갈수록 산머리는 기와를 타고 자꾸 건물 뒤로 내려가려고만 한다.

서원 쪽으로 다가가자 서원 뒤 산머리가 발걸음에 리듬을 맞추듯 조금씩 지붕 아래로 내려서더니 아예 지붕 뒤로 숨어 버리고 산머리를 좇던 눈발만이 분주하다. 산머리를 놓치고 내려서던 시선이 대문(외삼문)의 현판을 잡는다. 復禮門(복례문). '예를 다시 갖추는 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논어(論語)』의 「안연편(顔淵篇)」에는 공자의 제자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이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공자는 '인은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대답한다. '나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인'이라는 말이다. 예는 인을 품고 있다. 복장을 추스르며 마음까지 단속하던 옛 선비의 기풍이 느껴진다. 전통 건축이라고 해도 종류마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에는 차이가 있다. 살림집의 아름다움이 생활에서 시작한다면, 서원의 아름다움은 선학과 후학의 격식에서 출발한다. 복례(復禮)는 안팎으로 갖추어야 할 이 격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편하게만 지은 집이 좋은 한옥일 수 없듯, 격식에만 매달려서는 좋은 서원일 수 없다. 격식을 허물지 않으면서 아름답게 짓기가 쉽지 않지만, 병산서원은 이 점에서 매우 뛰어난 건축물이다.

예로 돌아감을 의미하는 복례(復禮)는 예에 인(仁)의 마음이 담겼음을 뜻한다. 복례문은 소실점 효과를 만들어 묘한 건축적 감응을 준다.

대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건물이 시야를 가로막는다. 바로 병산서원의 슈퍼스타 만대루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마음도 사로잡는 빼어난 건축물이다. 좁은 문을 지나 나타나는 만대루가 워낙 커서 사람을 순간 당황하게 하지만, 이는 자연스럽게 건축적인 효과로 이어진다. 만대루를 받친 기둥이 만든 사각 프레임으로 시선이 모여, 놀란 눈길이 차분히 계단을 올라 강당을 향하게 한다. 대문을 들어섰을 때의 답답함과 누 밑의 좁은 통로는 만대루가 주는 감동을 예비하는 장치다. 좁은 누 밑 계단을 지나 만대루에 오르면 사방이 터지면서 주변 풍경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건물이 창조해 낸 틀 속에서 재해석된 자연이다. 병풍처럼 펼쳐진 병산은 산세가 좌우로 잦아들며 시야를 끝없이 확장시키더니 건물 속으로 들어서는 낙동강과 함께 다양한 이미지를 형상화한다. 어디쯤 해가 있을까?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빛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을 그린 것처럼, 만대루 역시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매우 섬세하게 그려 낸다.

민초들의 생활 미학이 스며든 사대부의 도량

건축적으로 만대루는 강당의 앞마당이 확장된 모양새다. 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네 개의 건물 기둥이 모두 둥근기둥이어서 앞마당 자체가 기둥에 둘러싸인 건축적 이미지를 획득한다. 병산의 깎아지른 절벽과 둥근기둥이 만드는 이미지는 학자보다는 예술가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렇다면 당시 유학자들은 병산을 앞에 두고 두리기둥으로 세운 서원의 마당을 신선 세계로 상정하고 그 세계를 만대루까지 확장한 것은 아닐까? 누(樓)에 대한 첫 기록으로 꼽히는 중국의 『사기(史記)』에서는 누가 만들어진 배경으로 신선(神仙) 사상을 꼽고 있다. 신선을 꿈꾸던 유학자들의 마음은 서애의 스승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도산서당에서 퇴계가 쓴 글을 모은 『도산잡영(陶山雜詠)』에는 자신이 꿈꾸던 생활 속에 녹아든 노장의 생각을 읽어 낼 수 있다. 그 뉘앙스가 강당의 마당과 만대루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만대루(晩對樓)를 '달을 기다리는 곳' 정도로 해석하면, 그 의미가 훨씬 강렬하다. 표표히 떨어지는 달빛을 건지는 선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디 신선이 따로 있겠는가?

소실점을 좇아서 생각 없이 좁은 문을 지나온 사람이라면 갑자기 나타나는 커다란 만대루에 압도당하고 만다.

다시 누마루 밑을 지나 만대루에 오르면 갑자기 터진 시야가 주는 극적인 공간 변화로 인해 커다란 건축적 감동을 받게 된다.

마당 너머 입교당(立敎堂)이라는 이름표를 단 강당 건물도 흥미롭다. 교실과 교무실에 해당하는 이 건물은 방 사이에 대청이 있고, 기단에는 커다란 아궁이가 계단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입을 벌리고 있다. 그래서 건물을 전체적으로 보면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는 구조다. 비움과 채움의 매트릭스. 이를 유교의 음양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굳이 유학일 필요는 없다. 한옥에 구들을 들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아궁이고 대청이고 마당이다. 이리하여 아궁이가 비움이면 계단은 채움이 되고, 방이 채움이면 대청은 비움이 된다. 나아가 건물이 채움이라면 마당은 비움이 되는 것이다. 한옥에서 채움과 비움은 하나의 쌍이다. 구들을 양민이 발전시켜 온 점을 돌이켜 보면, 비움과 채움의 미학은 관념에서 출발한 철학이 아니라 민초들의 생활이 낳은 생활 철학이다. 조선 양반들의 상징적인 건축물에 스며든 민초의 생활 미학을 읽어 내는 것도 병산서원을 보는 재미다.

마당 좌우에 자리한 홍매화와 청매화가 모두 신선처럼 흰 옷을 입고 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강당으로 가는 동안 신선의 호위라도 받는 기분이다. 조선 시대라면 서원의 중심 계단을 이렇게 편하게 오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기왕에 누리는 호사이니 잠깐 엉덩이를 들여 대청에 앉는다. 왼쪽에 있는 방 명성재(明誠齋)는 서원의 교장실이고, 오른쪽의 경의재(敬義齋)는 교무실에 해당된다. 교장이 대청에 앉았을 만한 자리를 찾아 앉아 본다. 대청 중앙 안쪽에 자리를 잡고 보는 경치는 만대루에 올라가 보는 풍광과는 또 다른 건축적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입교당의 기둥으로 다시 한 번 분절된 자연의 풍광은 자연과 건축이 만나는 최적의 접점을 보여 준다. 그렇다고 병산서원의 건축미가 입교당 앞마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동행과 도란거리며 바라보는 뒷마당의 다감한 모습은 만대루가 만드는 이미지와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유학의 중심 공간인 입교당은 비움과 채움이 반복되면서 민중의 생활미를 잘 담아내고 있다.

교장실에 해당하는 명성재에 앉아 창과 문을 모두 열어 놓으면 병산서원의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재와 서재의 학생들은 움직이기 전에 명성재의 문부터 살폈을 것이다.

입교당의 교무실에 해당하는 경의재다.

외톨이가 된 주소, 그래서 자유롭다

서원에서 격이 제일 높은 곳은 입교당 뒤편의 사당이지만 주변을 장악하고 감상하기에는 이곳 입교당의 대청 자리가 으뜸이다. 병산서원은 입교당 대청에 앉은 이의 시선을 고집한다. 건물은 철저하게 입교당의 교장 자리를 중심으로 지어져, 그 자리에 앉는 것만으로도 서원 전체를 장악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구심력은 시선의 흐름을 무한히 밖으로 보내며 건축적인 원심력을 만들어 낸다. 원심력에 이끌려 시선이 밖으로 흐르자 마당을 오가는 몇몇 유생의 조심스러운 발길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입교당 앞 학생들이 머무는 동재와 서재의 모양은 닮은 듯 다르다. 문살의 수가 다르고 툇마루 벽 모습도 다르다. 왼쪽이 격이 높으니 동재에 상급생이 머물렀을 것이다. 동재는 담장과 나란히 짓느라 약간 비뚤어졌지만 눈으로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입교당과 직각으로 짓는 격을 고집했다면 지형에 맞춰 쌓은 담장과 균형이 맞지 않아 보기에 불편했을 것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한옥의 건축 방식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한옥의 자유분방함이 낳은 우리 건축의 매력이다.

병산을 병풍처럼 두른 만대루의 지붕 선이 아름답다. 눈 쌓인 지붕의 하얀 고랑이 아름다움을 더한다.

입교당 뒷마당의 아기자기함은 또 다른 감흥을 전해 준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계단은 원래 나무로 되어 운치가 있었지만, 현재는 단조로운 돌계단이어서 안타깝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은 보통 사당과 한 담장 안에 있지만, 이곳은 특이하게 사당과 전사청이 담장으로 나뉘어 있다. 사당-전사청-주소는 길을 하나로 잇는 것이 편하다. 주소(廚所, 부엌)에서 음식을 하여 전사청에 주면 여기서 제사상을 차려 사당으로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사청에서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자연 지형에 맞추어 짓는 대신 편리함을 양보한 모양새다.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병산서원 전체의 흐름에 닿아 있다.

사당은 새로 단장한 계단 때문에 훨씬 권위적으로 느껴진다.

병산서원의 생활을 책임지던 주소
편리함보다는 자연의 흐름을 따른 전사청
같은 듯 다른 서재(위쪽)와 동재(아래쪽)

변화를 좋아하는 전통 건축의 특성을 느껴 보자.

다음으로 꼭 봐야 할 곳이 살림집인 주소다. 외관상 사대부의 안채 정도로 보이는 주소는 하인들의 공간으로 강당 영역에 바투 붙어 있다. 강당 영역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조석을 책임진 곳이기 때문이다. 서원에 딸린 노비들의 거처이기도 하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병산서원 어느 곳도 볼 수 없다. 생활하면서 만대루를 볼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서원 전체의 관계에서 보면 분명 소외된 공간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문에 자유로운 공간이다. 서원 건물들 모두 강당인 입교당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는 중앙 집권적 배치지만 주소에서만은 프라이버시가 보장된다. 언뜻 보면 소외된 공간이지만, 훨씬 인간적인 곳이고 여기에서 보는 풍광도 대단하다. 대문을 열어 놓고 대청에 앉으니, 마당에 흩날리는 눈발이 문밖의 설경과 어우러져 만대루나 강당에서 보는 풍경과는 차별화된 색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주소 앞에 있는 뒷간의 담장은 달팽이 모양으로 아기자기하다. 슬쩍 들어가 앉아 보고 싶을 정도다. 공연히 요의를 느끼며 안으로 들어가니 하얀 눈이 덮여 차마 그 깨끗함을 더럽힐 자신이 없다. 볼만한 뒷간이 또 하나 있다. 서원의 대문(외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담장 끝에 있는데, 이 화장실도 꽤나 운치가 있다. 변을 보는 자리를 사람 눈처럼 타원형으로 디자인해, 홀로 된 공간에서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저 혼자임에도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 영원히 변하지 않을 가르침 하나를 마음에 담아 문을 나선다.

주소 앞에 있는 달팽이 모양의 뒷간은 화장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예쁘다.

달팽이 모양의 화장실에 눈이 쌓여 포근하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화장실

혼자 있을 때에도 스스로를 경계하도록 가르친다.

서원을 떠나기 전 다시 만대루에 오른다. 만대루에 올라 눈발과 함께 떨어지던 한낮의 햇살을 추억한다. 이미 아까의 그 풍경이 아니다. 서산으로 방향을 잡은 해가 낙동강을 자극해 끊임없이 이미지를 창조해 낸다. 만대루에 번진 석양빛이 아쉬운 듯 마음을 잡는다. 하지만 이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어둠이 내려 위태로운 고개를 넘는다. 서애가 넘던 그 고개다. 언덕 위로 위태롭게 올라서는 사이 해는 넘어가고, 병산서원은 자연 속으로 암전한다. 오호! 만대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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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만대루, 원지정사에서 보는 부용대

아무리 바빠도 부용대에 올라가 하회마을을 보면 좋겠다. 병산서원에서 멀지도 않고, 강이 마을을 감싼 독특한 하회마을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부용대 아래에는 옥연정사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서애가 낙향하여 머물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임진왜란을 회고하며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옥연정사는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건물이지만, 강과 어우러지는 경관도 빼어나다. 하회마을 안에는 서애가 삼십 대 중반 잠시 머물던 원지정사가 있다. 옥연정사와 원지정사, 두 건물 모두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이는 솜씨가 능수능란하다. 원지정사의 누각 연좌루(燕座樓)에서 바라보는 부용대 역시 일품이다. 병산서원의 만대루에서 마주한 병산을 연상시켜 연좌루를 작은 만대루라고 부를 만하다.

하회마을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이제 세계의 명소가 되었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양진당과 충효당을 비롯해서 국가 지정 건축 문화재가 아홉 개나 된다. 특히 충효당은 서애 류성룡의 생가라는 점에서 병산서원을 돌아보는 사람에게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회별신굿탈놀이 등의 볼거리도 하회마을을 찾는 이에게는 보석 같은 선물이다. 주말 나들이를 마치고 먹는 안동 간고등어는 하회마을에서의 추억을 좀 더 맛깔스럽게 해 줄 것이다.

병산서원 → (25분) → 부용대(옥연정사) → (15분) → 하회마을

병산서원 인근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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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들어가면서 '집'이라는 공간에 빠져들었다. 현재 한옥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다양한 활동으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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