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영정 가을



김 익 택

 

 

 

서산 노을 

붉은 그림자가

세월의 때자국 같이

식영정 검은 마루에 선연하다


그 옛날 귀인

필묵 초서가

맞닫이 검은 문 위 회벽에

화답해도 뜻 모르는 

나를 보고 


보고 있으면 뭐하냐고

바람이 비 웃는 듯

붉은 노송 잎을

휘청그리며 지나간다


이 모습 보고 있는

단풍잎은

속이 탔는지

속절없이 후르르

떨어지고 있다




 

 

 

 

 

 

 

 

 

식영정 


어떤 지날 손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듣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 많건마는
어찌 한 강산을 그처럼 낫게 여겨
적막산중에 들고 아니 나시는고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식영정(息影亭)과 서하당(棲霞堂)이 있는 별뫼(星山)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며 이렇게 노래했다. 식영정은 담양의 창계천가 언덕 위에 지어진 정자로 조선 중기 호남가단의 한 맥을 이루는 식영정가단의 중심이 되었던 장소였다. 정철은 이곳에서 가사와 단가, 한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성산별곡(星山別曲)〉은 정철이 김성원을 흠모하여 지은 가사로 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처럼 식영정은 송강문학의 산실로 우리나라 고전문학의 기틀이 마련된 곳이기도 하다. 창계천 주변에는 식영정을 비롯하여 서하당, 부용당, 환벽당, 취가정 등 많은 정자가 있고, 이웃에는 별서정원으로 유명한 소쇄원이 자리하고 있다.

식영정은 1560년(명종 15) 서하당 김성원(金成遠)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이었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정자다. 김성원이 쓴 시문집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에는 “공이 36세 되던 해인 1560년, 창평의 성산에 식영정과 서하당을 지었다(庚申公三十六歲 築棲霞堂于昌平之星山)”고 기록되어 있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우뚝 솟아 있는 노송과 한여름 붉은 꽃의 무리로 온통 뒤덮인 배롱나무가 함께 어울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식영정 전경

소나무와 배롱나무로 울창하게 둘러싸여 있는 식영정은 팔작지붕의 정자로서 2칸의 방이 후면에 있고 마루는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식영정이라는 이름은 《장자》의 〈제물편〉에 등장하는 ‘자신의 그림자가 두려워 도망치다 죽은 바보’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바보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끝없이 달아났다. 그러나 제아무리 빨리 달려도 그림자는 끝까지 그를 쫓아왔다. 더욱더 빠르게 달려도 절대로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이 다해 그만 쓰러져 죽고 말았다. 여기서 그림자는 인간의 욕망을 의미한다. 누구나 욕심으로 가득 찬 세속을 벗어나지 않고는 이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옛날 선인들은 세속을 떠나 있는 곳, 그림자도 쉬는 그곳을 ‘식영세계’라 불렀다. 식영정은 바로 이러한 식영세계를 상징하는 곳이다.

식영정의 주인이었던 임억령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노후를 이곳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연을 벗 삼아 생활했다. 그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개와 같이 여기고 산림에 묻혀 산 선비로 진퇴를 분명히 한 올곧은 지식인이었다. 그는 호남의 사종(詞宗)으로 불리는데 사종이란 시문에 뛰어난 대가라는 의미다. 해남의 석천동에서 다섯 형제 중 삼남으로 태어난 그는 14세 때 엄한 어머니의 뜻에 따라 청백리로 불렸던 조선 사림의 정통인 박상의 제자가 되었다. 임억령은 30세가 되던 해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가 금산군수로 재직할 당시 을사사화(1545)가 일어났는데, 그의 동생 임백령이 사화에 연루된 것을 알고 벼슬을 내놓고 향리에 은거했다. 그는 명종조에 다시 벼슬에 나아가 담양부사를 끝으로 은퇴한 후 이곳 식영정에서 은일했다.

식영정에는 당대를 풍미한 시인묵객이 드나들었는데, 그들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시를 짓고 노래를 했다. 이때 식영정을 다닌 인물로는 면앙정 송순, 사촌 김윤제,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소쇄공 양산보,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옥봉 백광훈 등이었다. 이들이 바로 식영정가단을 형성한 인사들이다. 특히 석천과 서하당, 송강, 제봉을 일컬어 ‘식영정 사선(四仙)’ 또는 ‘성산 사선’이라고 칭했다. 식영정 사선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식영정을 ‘사선정’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들 식영정 사선은 식영정과 환벽당을 오가면서 각 20수씩 총 80수의 〈식영정 20영〉을 지어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했다.

성산은 식영정의 뒷산인 별뫼를 말한다. 광주호가 만들어지면서 현재는 지형이 변형되었지만 과거에는 식영정 앞 창계천을 따라 경치가 뛰어난 장소가 많았다. 자미탄, 견로암, 방초주, 부용당, 서석대 등 식영정 주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가 곧 〈식영정 20영〉이다.

식영정을 지은 김성원은 정철과 함께 김윤제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유년에 창계천 건너 작은 동산 위에 지어진 환벽당(環碧堂)에서 함께 공부했다. 정철이 지은 〈성산별곡〉은 성산의 사계절을 아름답게 표현한 시가로 가사문학의 정수로 꼽힌다. 가사(歌辭)는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생겨난 우리 문학의 한 형식으로 시조와 함께 양반, 평민, 부녀자 등 다양한 계층에서 부른 노래를 일컫는다. 시가와 산문의 중간 형식인 가사문학은 담양 지방의 정자원림, 특히 이곳 식영정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식영정은 부용당, 서하당과 함께 정자원림을 구성하고 있다. 부용당과 서하당은 식영정 아래 낮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어 부용당 앞 연못의 가장자리에서 시작되는 돌계단을 올라야 언덕 끝에 자리한 식영정을 만날 수 있다. 계단 주변으로는 소나무가 울창하고, 식영정 정면에서는 소나무 사이로 광주호의 수면이 보인다. 과거에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온통 흐드러지게 핀 창계천의 여울이 아름답게 펼쳐졌을 것이다. 식영정 뒤편에는 〈성산별곡〉 시비가 서 있고, 그 뒤로 소나무가 가득한 성산 봉우리로 산세가 연결된다. 본래 정자의 ‘정(亭)’이라는 글자는 언덕 위에 집을 지어놓은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위치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식영정은 모범적인 정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김학범 집필자 소개

서울시립대학교 원예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표 저서로는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우리 명승기행: 역사문화 명승 편》, 《마을숲》, 《문화재대관(명승)》, 《서양조경사》, 《동양 조경 문화사》 등이 있다. 특히 문화재청에서 발간하는 〈헤리티지채널〉과 〈문화재사랑〉에 칼럼을 기고하며 우리나라 명승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공로로 2009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출처

우리 명승기행 | 저자김학범 |

소소하지만 소중한 우리 유산의 중요성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일깨운다. 특징에 따라 명승 49곳을 고정원, 누원과 대, 팔경구곡과 옛길, 역사·문화 명소, 전통산업·문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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