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와 벌 2
김 익 택
매화 향기 쫓아
날아 온 벌들이
제 몸 어는 줄 모르고
날개 짓이 바쁘다
짧은 해를 쫓는 바람은
구름 그늘 앞세워
바삐 산 고개를 넘어가고
윙윙대는 벌 날개 짓보다
몇 배 더 사나운 바람이
꽃 가지를 마구 흔드는데
꿀 한 줌 얻기 위한
벌의 바쁜 마음만큼
매화는
벌을 놓아주지 않으려 하고 있고
벌은
떠날 생각을 않고 있다
그대 어디 있는지 몰라도
김 익 택
그대 어디 있는지 몰라도
거기도 여기 밤처럼 맑다면
그대 어쩌면
저 달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달을 보고 안녕을 묻고
별을 보고 소원 빌었지
그대 어디 있는지 몰라도
거기도 이슬 내린다면
그대 어쩌면
마당에 나와
상념에 젖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슬을 밟으며 걸어보고
서리를 맞으며 걸었지
그대 어디 있는지 몰라도
거기에도 눈 내린다면
그대 어쩌면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편의 시를 읽고
한편의 그리운 시를 쓰곤 했지
매화 벌의 걱정
김 익 택
조석으로 손끝이 아리는
겨울의 끝자락
겨울 언 땅이
풀리기도 전에
매화가 활짝 피었다
먼 길 찾아온 벌
가시같이 아픈
맹 추위
아랑곳하지 않고
이꽃 저꽃 드나드느라
몸이 바쁘다
하지만 센 바람 불고
기온이 뚝 떨어지고 난 뒤
윙윙대던 벌들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 갔을까
바람에 휩쓸려
달리는 차량 바퀴에
어느 건물 모퉁이에
부딪치지는 않았을까
눈 거두는
내 등 뒤로 자꾸 따라붙는
애꿎은 생각
매화의 외로움은
벌이 알고
벌의 부지런함은
매화는 알겠지
그런데
무사히 돌아 갔을까
어디에 있을 그대에게
김 익 택
홍 매화 같이
고혹적인 그대
시간이 아픔을
여물게 하면
나 그때
그대 만나면
설레지 않을까
나중에 내 아이
지금 내 나이 그때
그대 만나면 그립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나 그대 찾지 않으리
사랑이
너무 아파서
찾지 않으리
세월 흘러
그대 얼굴
기억이 꿈 같을 때
그때 만나리
그때 만나면
봄 날 같은 지난 세월
뒤돌아 봐도
부끄럼 없고
그리움도 없고
아픔도 몰라
사랑했다고
정말 사랑했노라고
비로소 말 할 수 있어도
몰라서 새로운
그때 만나리
모르리 모르리라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깊어서
먼 훗날
내 못 다한 사랑
소설 같은 얘기
아니 꿈 꾼 것도 아닌데
땅 기운이 쏟는
봄 날 하루
모란 꽃 지는 뜰에서
오늘도 나는
어딘가 있을
그대를 생각하며
쌓아두면 그리움 되는 삶을
내일은 또
오늘보다 짙어질 푸른 신록처럼
그대를 그리워하리라
봄이 오면 아파요
김 익 택
하얀 얼음이 눈물처럼
똑똑 떨어지고
검은 땅에 새싹 돋고
차가운 꽃 바람 불면
내 발바닥에 뿌리 돋지 않고
내 팔에 새싹 돋지 않는데도
들판에 아지랑이 피듯
머리가 어지러워요
목련 꽃 활짝 피고
햇살이 눈부시면
정신을 차려도
눈 감기는 졸음같이
내 머리는 더 아파요
문 열면 보이는
벌거숭이 먼 산은
하루가 다르게
연 초록 빛으로 물들고
집 그림자 시원한 경계 너머
한낮 햇살이 봄을 재촉하면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감아야 해요
하늘 맑고
나무들 점점 푸르면
뻐꾸기 외로운 울음소리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라고
한쪽 가슴을 유혹해요
생각의 냇가에는 올챙이가
흙탕 물에서 바글바글거리고
하얀 찔래 꽃 가시가
눈살을 찌푸리듯 머리가 아파요
아파서 더 푸른 봄은
잦아지는 산통같이
따가운 햇살이
내 머리를 콕콕 찔러요
창밖에 영원한 누나 매화가 피고 있다
김 익 택
이른 봄
해 질 무릎
아직도 무릎이 시린 베란다에서
열 살 딸아이 클레멘티 소나티네 라장조를
한 달 넘게 배우고 있다
날씨가 추워서 일까
딸 아이 피아노 소리 바쁘고
끈질긴 겨울 바람은
매서운 꼬리로 유리창을 후려치고 있다
딸아이 가여운 손으로
성탄절노래
작별 노래를
서툴게 연주하던 연말은 가고 새해
어느덧 3월1일
태극기를 내 걸던 딸아이
피아노 앞에 돌아와 학원에서 배웠다며
유관순 노래를 연주하며 부른다
기미년 3월1일 터지자······
슬픈 노래를
발랄하게 부른 딸아이는
창문 블라인드를 젖히더니
매화가 피었다고
매화가 내 피아노연주 소리 듣고
일찍 피었다고
유관순 열사가
독립을 외치듯 베란다를 구른다
딸아이 말처럼
여러 매화나무 중에 베란다와 제일 가까운
한 그루에 매화가 피어 있다
눈 속에 피는 꽃
눈 속에 피었던 유관순
봄은 다 왔는데 봄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열사
딸아이
그 매화를 보며
유관순 누나를 연주하면
매화는 화답하듯
웃는 아이 같이 한껏 벙글어서
윙윙대는 벌들에게 꿀 젖을 먹이고 있다
사유의 굴레
김 익 택
살다 보면 이것도 저것도 하기 싫을 때가 있다
구름 너머 세상 바람 너머 세상 그 어딘가 갈 수 있다면 무작정 가고 싶을 때가 있다
혹 그곳이 다시 돌아 올 수 없다 해도 가고 싶을 때가 있다
때로는 아무 이유도 없이 길가는 사람에게 시비도 걸고 싶고 내 온몸에 푸른 멍이 들도록 두드려 맞으면 속 시원할 것 같은 때가 있다
홀로 방에 누워 있으면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들, 생각이 알을 낳고 그 생각이 또 알을 낳고 낳고······
퍼뜩 머리를 스치는 내가 모르는 나의 원죄는 무엇일까 골똘하게 되는데 나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원혼 있다면 그 업을 만나서 내가 다시 업을 쌓던 업장소멸을 하든 단판을 짓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천길 단애 앞에 서있는 것 같고 내가 가는 길은 끝도 없는 캄캄한 동굴 아니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빨려 들어가는 늪 지대 아니면 바위 속 화석처럼 단단하게 박혀 있어서 SF 영화 속의 신출귀몰한 주인공 아니면 않으면 영원히 빠져 나가지 못하는 내가 파놓은 늪 속에 빠져 허덕거릴 때가 있다
시작도 끝도 없고 어디가 삶이고 어디가 죽음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는 경계에서 헤맬 때가 있다
이럴 때 나는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내가 기억하는 과거의 나를 돌아보게 된다
코흘리개 때부터 초등학교 때 문방구 가게 주인 몰래 슬쩍 훔친 빵, 외상 술값 그리고 또 뭐가 있나 내가 그 누구에게
한 맺히게 몹쓸 짓을 했던가 아니지 파출소에 몇 번을 붙들려 갔었던가 양심적으로 사회적으로 나도 모르게 저지른 잘 못이 있기는 있었던가 없다 없어 기억이 없다 아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자 있었다면 그들의 원혼들이 이 깊은 밤 원귀 되어 나를 괴롭히는 것일까 아니지 아니야 인간 백정 다른 없는 히틀러 뭇소리니 도요토미 히데요시 김일성도 하늘의 심판 받지 않고 한 세상 잘 살다 갔는데
의심과 혼돈 속에서 나의 삶을 확인하려는 나
어두운 창 밖에서 천정에서 벽장 속에서 누군가 보고 있을 것 같아 입 속 우물거림도 알아 들을 것 같아 헛기침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다시 뇌리 속에 활개치는 파편들
파블로 피카소의 게르니카 그림 속에서는 아우성치는 소리가
살바도로 달리의 기억의 지속 그림 속에서 시간이 엿가락처럼 녹아 내리고 마르크 샤걀의 천사의 추락 그림 속에서 놀람과 절망의 표정들이 벽에서 천정에서 마구 튀어나와 얼굴과 얼굴 사람 속에 사람이 뒤섞여 사람인지 동물인지 괴물인지 삶인지 영혼인지 모르는 진리를 거스르는 죽음의 공포인지 모를 모두들 나름대로 이유 있는 똬리를 틀고 있는데 뭐라고 딱히 말 할 수 없는 인간의 굴레와 군상들이 뇌리 속에 한바탕 소동 치는데 내가 그 그림들과 상통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속의 우울의 단면 그것 밖에······
지은 죄 형벌을 보고 있는 것일까 경악하는 뭉크의 절규 그림들까지 내가 풀 수 없는 사유의 굴레가 이 밤 자꾸 새끼를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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