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연서원의 봄 향기
김 익 택
참 선비 학문
참 군인 정신
예가 아니면 벼슬도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의가 아니면 장군도 병사만도 못한 것이라
낙향하여 제자들 가르치던
그분 정신
몇백년 흘러
깊은 골의 참 샘같이
아는 사람 알고 모르는 사람 모르는
이곳 밀양은
참 선비 많고 참 장군이 많았습니다
무어라 말 못하는
시공간을 뛰어 넘는
풋풋한 봄 향기가
오랜만에 나그네 정신에
봄 같은 봄
초록 봄빛이 스민다
어변당 마루 앉아
김 익 택
충성과 효심은
인륜이며 천륜이라
몇백년 시간을 초월한
그의 정신같이
어변당에 초록빛이 완연하다
해묵은 어변당 마루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연지에는
황금잉어와 거북이 볼 수 없어도
앙상한 목백일홍 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
어변당 편액에 빽빽한 한자같이
수화로도 알 수 없는
지저귐처럼
짧은 한자 실력 어림짐작이
죄스럽기만 하다
어변당 은행나무의 인내
김 익 택
인내가 무엇이며 삶이 무엇인지
그 해답
어변당을 지키는 듯 덕연서원을 지키는 듯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를 알 것이다
은행나무 수령 줄잡아 몇백년
하늘의 날벼락을 맞은 걸까
어느 못된 사람의 화덕질인가
아름드리 은행나무 속이 불에 타 숯 검댕이다
열길 물의 속내 모르듯
은행나무 겉 모습은 온통 푸른 잎
다만 무질서한 새로운 가지가 많다는 것 외
숯 검댕이 속과는 다르게
은행나무껍데기는 파릇파릇한
새싹이 초동처럼 반들반들 윤기가 흐른다
살아야 한다는 그 강한 의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면 모두 알 수 있을 터
비참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뜨거웠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아무리 상상해도 그 아픔 헤아릴 수가 없다
위로와 치유 그 한계를 벗어난 인내에
박수 아니라 미안해 그 말 밖에
숯 검댕이 은행나무 속을 보면
죽음까지 인내한 그분의 삶의 인내인가
얇은 껍데기에 새 가지를 돋아
파릇파릇한 잎을 피우는 걸 보면
죽어도 거듭나는 그분의 불굴의 정신인지
나그네 가슴이 이는 생각
도대체 누가 저런 짓을
그 다음에는 그 환경에 살아 있다는 것
알아도 모르고 몰라도 아는 것 같은
삶의 진리를 감탄을 아니 할 수 없다
어변당 은행나무에게 사과
김 익 택
그곳의 상처는
얘기로 모자라는 비탄
누가 무엇 때문에
화형을 하려 했을까
몇백번을 생각해도 납득불가다
몇백년 삶
몇백년의 삶의 희망을
하루아침에 죽이러 했을까
낙뢰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다
못된 정령이 깃든
마을의 수호신 아니고
몇백년 거기 그 자리에서
사시사철 많은 생명 품었을 뿐이다
때로는 까치 집이 되었다가
직박구리 집이 되었다가
부엉이 집이 되었을 뿐인데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보는 내가 화가 나고
보는 내가 미안하다
덕연서원 소감
김 익 택
공자 왈 맹자 왈 요즘세대에겐 꼰대
구시대의 유물 취급 받아도
그 시대에는 다시없는 신세대 학문
충효사상은 시대를 초월한 정신문화
지켜야 하고 보존해야 하는 윤리인데
덕원서원 몇백년을 텅 빈 채 외로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사람이 외로워서 일까
그 옛날이 그리워서 일까
때묻고 낡은 편액마다 빼곡한 한자들은
알지 못해도 정감이 들었고 존경스러웠다
내 집 아니어도 편안한 것은 웬 일일까
마루에 앉아 이곳 저곳 구경하는 동안
나도 이런 집에 살아봤으면 하는 맘
뇌리에 떠나지 않았다
덕연서원 어변당
김 익 택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푸른 잔디 가득한
넒은 마당 좌우 기와집에
봄 햇살이 가득한데
낡은 담장 따라 붉게 핀 철쭉이
촌스러워서 더 정겹다
둘러 보는 내 눈에는
내가 조선시대를 돌아간 기분
내가 유생이었던가 진사이었던가
설레는 이면에 편안하다
이곳 오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
누군가에게 하고싶고
내 눈 내마음에 오래도록 간직하고 파
샅샅이 아니 살펴볼 수 없다
어변당 은행나무의 교훈
김 익 택
아픈 애기 바라보는
엄마 속이
너만큼 고통스러웠을까
참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꼭 살아야 한다
그 이유 얼마나 간절했으면
고통 그 한계 견딜 수 있었을까
아 그래
살아 있는 그것만으로
삶의 교훈은
이미 목적 달성을 한 것이지
또 뭐 있을까
앞으로 백년 천년 후에 삶
그것 아니면
2021년 코비드19 나라위기
정치 못 차리는 정권에 대한
어변당의 항의 일까
죽어도 살아야 한다는
은행나무야 살아줘서 고마워
김 익 택
그래 얼마나 아팠겠냐
내가 불에 데어 봐서 알지
살이 썩는 것보다
죽은 살을 걷어내며
치료하는 것이 더 아프지
그 고통
죽음이 그만 할까
상상으로 짐작할 수 없는
그 고통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르지
그래서 더 고마워
살아줘서
표정 없고 말 못해서 그렇지
무슨 위로가 되겠냐 마는
내가 미안해
어변당 은행나무 삶의 충격
김 익 택
거기 그 자리 살아온 지
몇 백 년
피해주는 일 얼마이며
도움주는 일 얼마나 될까
봄에는 푸름 여름에는 그늘 가을에는 열매
오래 살아서는 삶의 경의와 존경
그것만으로 충분한 조건 아닐까
그런데
무슨 이유로
못살게 구는 것도 모자라
불을 질러 죽이려고 했을까
속을 다 태우고 남은 건
겁데기 뿐
죽음을 넘은 삶
그래도 살아야 미래가 있음을
이곳 저곳 새순 푸른 잎새가 싱그럽다
▲ 밀양 어변당]
효성이 지극한 박곤이 양친 봉양을 위해 집 앞에 작은 연못을 만들어 고기를 길렀는데 고기 한 마리가 어느 날 붉은 비늘을 남기고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 기이한 일이 벌어지자 고을 사람들이 그때부터 이 연못을 어변당(魚變堂)이라 불렀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그후 박곤은 3차례나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남쪽의 대마도와 북쪽의 야인을 정벌할 때 고기가 등천하면서 남긴 고기의 비늘로 말안장을 장식했더니 말이 나는 용과 같이 빨랐다해 적군들이 비룡장군이라 불렀다 한다.
박곤 장군은 이천현감, 참의, 참판, 전라도 도관찰사, 강원도 도순무사, 충청도 도순찰사, 한성판윤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사실들이 세종실록, 밀양읍지 등에 기록되어 있다.
덕연서원에는 박곤 장군을 비롯해 후손인 박몽룡과 박세웅이 함께 봉향되어 있다.
많은 전설과 무용담, 그리고 나라를 위해서는 자신을 돌보지 않았고 태평성대에 이르러서는 자연에 순응하며 학문에 전념한 선현들의 모습을 덕연서원에서 찾을 수 있다.
어변당은 경남도 지정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적룡지는 도 기념물로, 상당동 박씨 종중의 유품과 고문서등 51점은 경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장금성기자
출처 : 경남도민신문(http://www.gndomin.com)
어변당 박곤의 소개
후조선 건국 6년인 1397년에, 충주목사를 지내고 호조참판을 지낸 밀성박씨 의번의 아들로 태어난 박곤은, 학문에 열중하고 무예를 연마하며 병서를 즐겨 읽어서 21세에 무과3과 과거에 모두 장원 급제한 효자로서, 17세이던 1413년에 공부방 앞뜰에 가로11m 세로11m 깊이 2m 정도인 사각형 연못을 파고 고기를 길러 부모님의 밥상에 올렸다. 매 끼니마다 자기 밥 한술씩을 고기밥으로 주고 한두 마리를 잡아 양친의 밥반찬으로 올릴 때, 유달리 붉은 고기 한 마리가 있어 어린고기를 거느리고 다녔다. 1421년에 부모님 별세하고 3년상을 마친 1423년 어느 날, 그의 꿈에 붉은 용이 나타나 말하기를, 부모님께 대한 지극한 효성에 감탄하였다고 하며 “내일 낮에 승천하면서 적린(붉은비늘) 두 장을 두고 갈 테니 생명이 위태로울 때 잘 사용하시오.” 하고 사라졌다. 과연 이튿날 낮에 소나기가 내리더니 무지개가 서고 연못가에 나가보니 손바닥 보다 넓은 붉은 비늘 두 장이 있는지라 주워서 보관하였다가 훗날 여진 정벌 때 말안장 밑에 깔고 말을 달리니 비룡장군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1425년 명나라 사신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갔을 때, 명황제가 그의 출중한 기골과 품행을 보아 명나라 조정에서, 자기 곁에서 벼슬을 하라고 권했으나, 조선의 삼남지방에 출몰하는 왜구와 나라의 안위가 걱정되어 사양하였다. 명 황제는 하는 수없이 그가 머무는 동안 미희(美姬) 셋을 들여, 세 미녀에게서 세 아들을 얻게 되었고, 황제가 그 세 아이에게 일걸, 이걸, 삼걸로 이름을 지어주고 박씨를 명나라의 표기법으로 표(瓢)씨로 성을 내렸다. 550여 년이 지나 이들의 후손이 행방이 묘연하여 전설에 묻혀 갈 상태에서, 각종문헌을 토대로 어변당 18세손 박병륜은 각고의 노력으로 1990년 12월 이들의 집성촌을 찾아내고 양쪽의 후손들이 얼싸안고 향사를 받들게 되어 전설이 아닌 역사가 되었다. 연못의 붉은 고기가 붉은 용으로 변하였으니 그가 공부하던 사랑채는 어변당, 붉은 용이 살던 연못은 적룡지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 선조들의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은 결코 달빛에 어스름한 설화나 전설이 아니라 태양에 빛나는 역사임에 틀림없다.
밀양 적룡지(密陽 赤龍池)
경상남도 기념물 제166호
경남 밀양시 무안면 연상리 394
어변당은 박곤(朴坤, 1370~1454) 장군의 사랑채인 어변당 앞에 있는 적룡지(赤龍池)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이상향을 보여주는 연못이다. 연못 안에는 돌로 섬을 만들었는데, 이는 신선이 산다는 동해의 봉래산(蓬萊山)을 상징하는 것으로 신선(神仙)사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 연못은 어변당(魚變堂)과 관련된 설화를 가지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를 옮기면, 장군이 어렸을 때 어머니가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마침 겨울이라 그것을 잡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도 장군은 마을 앞 냇가로 가서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하여 고기를 잡아 어머니께 대접하였다고 한다.
어린 박곤은 어머니께 계속해서 고기를 대접하기 위해서, 집 앞의 뜰에 연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렀다. 그런데 그 연못에는 유별나게 비늘이 붉은 잉어가 살았는데, 이 잉어를 연못 안의 자라가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이에 장군이 그 잉어를 구해 주었다. 그러자 그 잉어는 비늘을 남겨주었고, 장군은 그 비늘로 갑옷을 만들어 입고 전장에 나가 승리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장군의 효성에 감동하여 잉어가 비늘을 남겨놓고 용으로 승천하였다 하며, 그 고기가 용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의 호와 사랑채에 모두 ‘어변(魚變)’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상세설명
어변당(魚變堂)은 조선초기의 장수였던 어변당 박곤(朴坤)장군이 무예와 학문을 닦던 곳이다.
그는 밀성 박씨 태사공파(太師公派) 박언부(朴彦孚)의 11대손으로 연상리로 이주해온
박의번(朴義番)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양왕 3년(1391년)에 태어났다.
박곤은 무과에 응시하여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를 두루 거쳐 21세에 장원급제하였고
세종 1년(1419년) 최윤덕(崔潤德) 장군의 막하(幕下)로서 대마도 정벌 및 남해 왜구를 토벌 하였고,
34세인 세종 11년(1429년) 순문사(巡問使)로
북방의 성(城)들을 살피고 국방정책의 입안에 참여 하였다.
그 후 공조(工曹), 호조(戶曹), 예조참판(禮曹參判) 및 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거쳤고,
특히 축성(築城)을 맡거나 진지(陣地)를 심사하고 국방의 자문에 치중 하였다.
세종 18년(1436년) 명(明)나라 영종(英宗) 즉위시 하례사(賀禮使)로 갔다가
황제가 그의 사람됨을 보고 벼슬을 내렸을 때 거절하였는데, 대신 미인 3인을 얻어
그곳에서 일걸(一傑), 이걸(二傑), 삼걸(三傑)의 세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표(瓢)씨의 성을 얻어 중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귀국후 다시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40대 중반에서부터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연못앞에 어변당을 짓고 여기에서 여생을 마쳤다.
어변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서 별당채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박곤이 중국에서 돌아온 1440년경에 건축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1841년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이호윤(李顥潤)이 쓴 그때의 중수기(重修記)를
편액(扁額)에 기록하고 있다. 배치는 앞에 방지(方池)를 두고 그 폭에 맞추어
3칸의 어변당이 서향(西向)하여 있고, 그 앞에 박곤이 심었다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역사를 말해주며 서 있다.
평면은 2칸 대청과 온돌방 1칸을 두었는데 대청의 남쪽을 개방하여
측면 진입을 만들었고, 전후로는 툇마루를 두었는데
앞에만 계자각난간(鷄子脚欄干)을 하였다.
기둥은 전부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민도리의 3량(樑) 맞배 구조에
연등 천장을 하고 있다. 현재는 주위의 영역이 정화되어
중앙에 충효사(忠孝祠)가 들어서 있으며 그 오른쪽에 유물관(遺物館)이 있고
왼쪽에 어변당(魚變堂)이 있는 배치 형태이다.
출처 : 밀양시청 홈페이지
어변당 박곤 장군의 설화
지금부터 오백여년 전 이조 세종 때 무안면 상당동에
박곤(朴坤)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가난한 살림 속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효성 또한 지극했다.
늙은 어머니의 밥상엔 고기가 빠지지 않을 만큼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는데 정성을 다했다.
어느 이른 봄날, 높은 산에 잔설이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박곤은 작살을 가지고 강으로 고기잡이를 나갔다.
어머니께 드릴 고기를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은어 잡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물살이 갈라져 흐르는 큰 바위 밑에 왔을 때였다.
얕은 물밑을 내려다보니 솥뚜껑보다 큰 자라가
황금빛이 찬란한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는 금붕어가 너무 아름다워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금붕어는 박곤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자라의 위험에서 구출해주시를 바라는가보다 하고
금붕어를 구하기를 마음먹으며
“저렇게 귀한 금붕어를 마구 뜯어 먹다니 ‥‥‥”
그는 작살로 자라의 목을 향해 힘껏 찔렀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자라는 물었던 금붕어를 내놓으며
순식간에 깊은 물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자라의 위험에서 벗어난 금붕어는 지느러미에서 선혈을 흘리며
박곤의 다리 가까이를 맴돌았다.
박곤은 금붕어를 살렸다는 안도감에 금붕어를 뒤로 하고
강가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금붕어는 박곤의 뒤를 따라 강가에 까지 와서
뭍으로 올라오려고 애를 썼다. 박곤은 이상한 일이라 여기며
금붕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손을 대기가 아까울 만큼 귀한 금붕어였다.
그래서 그는 금붕어를 집에 까지 갖고 와서 집안 연못에 넣어 주었다.
어머니도 아들로부터 금붕어를 잡아오게 된 내력을 듣고
“보통 물고기가 아닌 것 같구나 연못에서 고이 자라도록 해야겠구나”
하고 금붕어에 대한 걱정을 했다. 그후 금붕어는 박곤이나 어머니가
나타나기만 하면 물 위에 솟구쳐 오르며 반가는 듯 했다.
어느날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주인님. 주인님” 하며 부르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박곤은 누구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것은 연못에 있는 금붕어였다.
“아니 네가 말을 하다니”
박곤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어서 물가에 나온 금붕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그동안 저는 주인님의 은혜로 잘 지냈읍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주인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조금 후에 저는 용이 되어 등천 할 것입니다. 제가 등천하는 동안 날씨가 험해질 것입니다만
주인님은 놀라지 마십시오. 주인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연못가에 표적을 남겨 두겠습니다.
그것을 갖고 주인님이 성공하시는데 사용하옵소서! 주인님, 안녕히 계십시오”
박곤은 너무 놀라운 일에 눈을 번쩍 떴으나 꿈이었다.
꿈이 너무 이상해서 연못가로 나가 보았다. 어느 때 같으면 박곤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수면으로 나올 금붕어가 박곤이 연못가에 서있어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런데, 하늘을 올려다보니 갑자기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고 사방이 캄캄해져 오더니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의 크신 은혜를 입고 저는 지금 등천하옵니다.”
꿈속에서 듣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높은 하늘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비가 멎고 하늘이 다시 열리며 사방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을 우러러보던 박곤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연못을 쳐다보았더니
금붕어의 흔적은 하나도 없고 발 앞에 금붕어의 가죽이 놓여 있었다.
꿈속에서 말한 금붕어가 등천한 표적이었다.
그런일이 일어난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후 조정에서 과거를 본다는 소문을 듣고
박곤도 과거에 응해 보고자 하였다.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금붕어가 남긴 가죽을 조금씩 붙였다. 그랬더니 금빛 찬란한 갑옷과 투구가 되었다.
그것을 입고 과거장으로 갔다.
과거에는 팔도에서 올라온 담력 크고, 힘이 센 장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곤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과에서 장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함경도 병마사가 되어
변방의 양민들을 보호하고 오랑캐를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오랑캐들은 박곤 장군의 갑옷과 투구만 보아도 싸우기를 꺼리고 도망을 쳤다.
이리하여 박곤 장군의 뛰어난 전공은 온 조정에 알려지고
임금은 장군을 친히 불러 큰 상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해 그는 왕명을 받들어 명나라에 동지사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 황제가 박곤 장군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탄복하여.
“조선에는 과연 훌륭한 인재가 있었구나.” 하고 큰 상을 내렸다.
그리고 황제는 명나라에서 뛰어난 장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박곤 장군과 명나라 장군의 대결 시킨 결과 명나라 장수들이
박곤 장군 앞에서 칼을 뽑기가 무섭게 패하는 것을 보고
다른 장수들은 겨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칼싸움 뿐만이 아니라,
궁술이며, 창술이며, 온갖 무예를 겨뤄도 박곤 장군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이에 감탄한 명나라 황제는
“박장군! 그대의 신술을 일찍이 들었지만 이렇게 뛰어난 줄은 몰랐소.
조선의 왕은 이처럼 훌륭한 장수를 두고 있으니 부럽기만 하구려.
그대에게 명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상으로 내릴 터인즉,
그 여인과 길이길이 행복하게 지내시오” 하고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다.
박군 장군은 상으로 내린 미녀를 맞아 결혼식을 올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명나라 장수를 꺽긴했지만 그는 조금도 오만하거나 자랑하는 빚도 나타내지 않고
겸손해 할 뿐이었다.
그런데 박곤 장군에게 패한 명나라 장수들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원통해 했다.
더구나, 명나라 제일가는 미녀를 박곤 장군에게 빼앗긴 것이 더욱 억울했다.
이날 밤 박곤 장군이 미녀와 함께 잠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복면을 한 자객이 박곤 장군이 거처하는 담을 넘어 침실로 숨어들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보낸 자객이었다.
깊은 잠속에서도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를 어렴풋이 듣고 있었다.
또한 누군가 잠을 깨우는 것 같아 눈을 떴다.
그리고 시커먼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어둠속에서 볼 수 있었다.
“누구냐 이 밤중에”
박곤 장군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자객을 노려보았다.
“내가 누구냐고? 네 목숨을 가지러 온 명부(저승)의 사신이다.
네가 갑옷을 입었을 때는 날고뛰는 용맹한 장수이지만 지금은 별수 없을 것이다”
자객은 시퍼런 칼로 장군의 가슴을 향해 찌르려고 했다.
“이 비겁한 놈! 너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어서 물러나지 못 하겠느냐?”
박곤 장군은 위엄을 잃지 않고 자객에게 호통을 쳤다.
“흠, 죽기 전에 큰 소리 한 번 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군. 자, 내 칼을 받아라.”
자객은 칼을 휘두르며 박곤 장군 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는 장군의 목덜미를 내려 쳤다. 순간 자객은
“으악”
하고 칼을 든 채 까맣게 타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놀란 것은 박곤 장군이었다.
자객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던 장군은 그때 옛날에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주인님, 저입니다. 주인님의 은혜로 등천한 금붕어입니다.” 금붕어의 목소리였다.
“오! 네가 여기까지 와서 나를 도와주었구나. 참으로 고맙구나.”
금붕어의 은혜로 살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부디 만수무강 하옵소서, 저는 또 하늘나라로 가봐야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곤 장군이 금붕어의 은혜로 살았다는 소문이 온 장안에 퍼지고
그 뒤로는 아무도 박곤 장군을 헤치려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며
모두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 뒤 장군 내외는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그 재질이 모두 뛰어나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장종삼걸(將從三傑)이라 했다.
박곤 장군에 대한 또 다른 일설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500 여 년 전 무안면 상당동에 사는 박곤 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집 안에 연못을 파고 고기를 기르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는 식사가 끝나면 항상 연못속의 잉어에게 밥을 주곤 했는데 어느 날, 밤
잉어에게 밥을 던져 주고 나서 살펴보았더니 그 잉어가 밝은 달빛을 받고
찬란한 광채를 띄고 있었다. 박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을 느끼며
그날 밤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저는 주인님의 은혜를 받고 연못에서 자란 잉어입니다.
내일 정오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등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서남쪽 10정(町)쯤 되는 곳에 사는 도마뱀이 저의 등천을 방해하고 있사오니
도와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사옵니다.” 하고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박곤은 잠을 깨고 나서 정신을 가다듬고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며 연못으로 나가 보았다.
연못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여간 다음날 박곤은 활을 준비하여
꿈속에서 일러준 대로 뒷산 마루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오쯤 되어 과연 자기집 연못에 무지개가 서더니 한 마리 용이 무지개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이때 고개 마루 저쪽에서 큰 도마뱀이 꼬리를 치며 무지개쪽으로 날아들었다.
박곤은 이때다 싶어 겨냥하고 있던 활을 힘껏 당겼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한달쯤 되어 박곤은 무안 시장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
가는 도중에 어떤 노인 한 분이 삼치를 팔고 있다가 박곤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싼 값에 드릴테니 한 마리만 사라고 권했다.
박곤은 값이 너무 싸기도 하여 삼치 한 마리를 사들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박곤이 삼치를 장만하다가 머리에 박힌 화살촉을 발견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그전에 도마뱀을 쏠때 사용한 화살촉 임에 분면했다.
삼치는 먹지 않고 산에 가져다 묻었다.
며칠 후 삼치를 묻은 자리에 딸기나무 한 포기가 올라오더니 얼마 되지 않아
딸기가 주렁주렁 열렸다. 박곤은 그것을 보고 가족들에게 그 동안의 사연을 이야기 하면서
딸기를 따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시켜 딸기줄기를 불태워 버렸다.
다시 반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박곤의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와
자기가 손수 만든 것이라며 자리 하나를 선사했다.
산에서 자라는 휜초(휜草)를 베어 만든 자리였다.
친구가 돌아가고 난 뒤 박곤은 그 자리를 깔고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꿈속에서 뱀이 나타나더니
“이제야 원수를 갚게 되었구나 너 때문에 내가 등천을 못하고 말았지 않았느냐” 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놀란 박곤이 벌떡 일어났는데, 등골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자리에 박힌 가시에 등이 찔린 것이었다.
그 후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았고 그는 그 병으로 인해 결국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다.
그래서인지 박곤장군의 후손은 얼마되지 않고, 또 그들은 제사때 삼치고기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상당동에는 그 옛날 박곤 장군이 살았던 곳에 어변당이란 사당이 있고
박곤 장군이 심었다는 큰 은행나무(높이 20여미터 가량 굵기가 3m 50cm)가 서있다.
박곤장군은 벼슬이 첨홀제(僉惚制) 호조참의, 호조참판, 충정도관찰사,
강원도 순무사등 조정의 요직을 두로 걸쳤으며 두만강과 암록강의 국경을 방비하고
서북양면을 개척하였으며 중국사신으로 가서 그곳 여자와 결혼
일걸, 이걸, 삼걸의 세 아들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벼슬을 하였으며
거기서는 성을 표(瓢)씨라 불렀는데 그 아들이 우리나라 칙사로 와서 고향소식을 묻고자
하영남(下嶺南)에서 벼슬하려 온 사람이 없느냐고 묻자 누군가가 대답하기를
박곤장군의 자손들은 다죽고 없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칙사를
영남 밀양까지 모실려면 거기까지 길을 딲아야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칙사는 그것을 그대로 믿고 돌아가버렸는데
지금도 만주 길림 근처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끝)
[출처]
미리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