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은하사
김해시 삼방동 신어산 초입에 있는
은하사는 시내에 가까이 있어 김해 시민들에게는 친구와 같은 장소다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사찰 뒤 신어산의 암석과 소나무는 조화 이루어 동양화를 보는 듯 아름답고
사찰 경내 대웅전은 사찰과 달리 인도에서 건너온 허왕후의 전설이 담겨져 있는 벽화와 명부전 방문살은
눈길을 끌기 충분하다.
사찰 입구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튼실한 종루의 기둥은 자연적 그대로 멋이 있어 처음 오는 사람들은 종루 한 하나 만으로 매력을 느낄 것이다.
그리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는 경내를 둘러보다 숲 우거진 숲 바위에 앉아 사색을 즐기는 것도 유명한 사찰 못지 않을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사진 맨 아래쪽
- 국제신문
- 노수윤 기자님이
- 취재한 은하사 유래와 역사를 참조 바랍니다.
- 국제신문
- 노수윤 기자 synho@kookje.co.kr
- 임진왜란 때 불타 인조 때 중건
- 대들보에 '수로왕 42년에 창건' 기록
- 우리나라 불교 유입시기보다 앞서
- 서향 대웅전, 허왕후 고향 번영기원 說
- 진입로 소나무숲 '달마야 놀자' 촬영지
남해고속도로 동김해IC를 빠져나와 직진하다가 인제대 후문에 못미쳐 도로가 좁아지는 곳에서 우회전하면 신어산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1.5㎞ 정도를 올라가면 절 하나를 만난다. 신어산이 품고 있는 은하사다.
가야시대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절'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과 달리 대웅전과 삼성각 등을 보면 수백 년의 세월을 느낄 수 있어도 2000년 가까운 장구한 연륜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가야시대에 창건한 은하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고, 지금의 은하사는 조선 인조 때 중건한 조선 후기의 절이다. 사찰이 다시 세워진 역사로 본다면 전국의 여러 고찰에 비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은하사는 수로왕과 허왕후,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을 비롯해 가야 건국 신화가 곳곳에 배여 있는 '이야기가 있는 사찰'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시조?
방문객들은 은하사가 가야시대인 서기 42년 장유화상이 지은 절이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저 신어산 자락에 자리잡은 고찰 정도로 여긴다. 문헌에 정확하게 기록된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절의 역사는 대들보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 인조 때 대들보를 올리고 쓴 상량문을 보면 '수로왕 42년에 창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하면 은하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된 사찰이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절이 어디라고 명확하게 규정된 것은 없다. 다만 고구려 소수림왕 때인 372년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됐다는 역사적 사실에 견주어 보면 은하사는 분명 최초의 절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창건 당시 이름은 금강사로 알려져 있다. 신어산이 옛날에는 소금강산으로 불리웠고 이를 따라 금강사로 칭했다가 서림사가 되었다고 한다. 신어산을 은하산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은하사가 됐다는 설도 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조선 인조 때 중건 당시 밤 하늘에서 은하수가 온 천지로 쏟아지는 듯해 은하사로 바꿔 불렀다는 것에 더 공감을 한다.
■서쪽을 보고 있는 대웅전
전국 고찰의 대웅전은 거의 동남쪽을 향하고 있다. 주택도 마찬가지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에는 햇볕이 잘드는 동남쪽을 향하게 짓는 것이 보통이다.
은하사는 다르다. 대웅전이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 동남쪽을 바라보게 지을 수 있는 데도 서쪽을 향하게 한 것은 은하사의 또 다른 이름인 서림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정확한 고증은 없으나 전하는 설에 따르면 신어산 서쪽에 지은 절은 서림사라하고 동쪽에는 지은 절은 동림사라 했다. 동림사는 가야의 번성을 기원하기 위한 절이라고 하나 현존하지 않아 사실 여부를 알기는 어렵다.
전문가들은 은하사의 대웅전이 서쪽을 바라보도록 지은 것만으로도 창건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고 설명한다. 서쪽은 인도를 바라보는 방향이다. 그러기에 은하사는 허왕후의 고향인 인도 아유타국의 번성을 기원하는 절이라는 것이다. 이 사찰이 서림사라고 불린 것은 이런 창건 의도를 담은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은하사에는 대웅전이 서쪽을 향하는 것 말고도 가야 건국과 연관된 전설들이 곳곳에 서려 있다. 수로왕릉(납릉) 맞은편에 서 있는 정문에 새겨진 쌍어가 이 절에도 조각돼 있다. 수로왕과 허왕후로 대별되는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의 결합이라는 이야기를 은하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거리
은하사는 명산 신어산 자락에 위치한 데다 김해와 부산을 굽어볼 수 있어 경관이 좋기로 유명하다. 풍경이 일품인 진입로의 소나무 숲은 영화 '달마야 놀자'의 주무대가 되기도 했다.
김해시가 매년 개최하는 가야문화축제를 통해 무대에 올리는 뮤지컬 '제4의 제국 가야'는 가야 건국 신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은하사가 배경도 아니고, 장유화상이 절을 창건하는 모습을 담고 있지 않으나 뮤지컬에 등장하는 장유화상을 통해 가야에서의 그의 역할과 은하사 삼성각에 봉안된 그의 진영을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는 4월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신행길을 주제로 한 뮤지컬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장유화상 등과 함께 인도를 떠나 창원시 진해구 용원 망산도에 도착한 허왕후가 장유면을 거쳐 김해로 들어와 수로왕과 결혼하고 왕비가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는 허항후의 신행길과 관련한 스토리텔링도 계획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은하사도 재조명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장유화상은 은하사를 창건한 데 그치지 않고 일곱 왕자를 출가케 해 칠불로 재탄생토록 했고, 국사로서 국왕의 자문에 응하면서도 수행정진에 전념해 성불을 이뤘기에 스토리텔링에서 빠질 수 없는 소재가 되기에 충분하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타고 재만 남은 사찰을 조선 후기에 다시 세운 덕분에 은하사는 잃어버린 가야제국의 전설을 다시 품게됐다. 그리고 가야 건국 스토리텔링을 통해 지금까지 품어만 왔던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 '신어'는 가야의 표식, 남·북방 만남상징 '쌍어'…대웅전 대들보에 또렷히
사찰이 지어질 때부터 존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불탄 절을 조선 후기에 중건하면서 대들보에 그린 것을 감안하면 절 창건 당시에도 신어가 현재의 자리에 있었을 것이란 사실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절 중건 때 대웅전의 방향과 대들보의 신어 등과 같은 것을 고증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설치하고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용이고 몸통은 물고기인 신어는 가야의 표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신어가 산의 이름도 바꿨다. 소금강산, 은하산으로 불리던 이 산이 신어산이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 신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특히 가야의 상징이랄 수도 있는 신어가 은하사 대들보에 그려진 것은 가야 건국에서 은하사가 빼놓을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지금도 안개 낀 신어산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면 눈 아래 펼쳐진 기암괴석이 마치 신어가 헤엄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 장유화상의 은하사 창건 등은 역사서에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가야의 중요 유적 곳곳에 새겨진 쌍어만 보더라도 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 가야 번창, 은하사 등 가야 초기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