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압지 야경
김 익 택
네가 아름다운 것은
칼 바람 용해하고
구름 비 이해하는
시간의 굴레에
묵묵히 입을 다문
인내 때문만이 아니리라
추우면 춥다 하고
더우면 덥다 하는
아이 같이
비바람 앞에 무릎 꿇은
시간의 잔해로 남은 실체일 뿐
고관대작 거문고 타고
시 읊던 정자의 음률
사라진 천 년은
잃어버린 시대의 꿈
슬픈 유산으로 남겨두고
지금은 너도 나도 주인
LED 조명으로 치장한 정자는
옛 시대의 영화로움
단면을 보는 것인 양
그 화려함의 극치를 뽐내고 있다
월지에 달은 없어도
문명의 새 옷을 갈아입고 맞이하는
정자의 홀린 많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문명이기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기 바쁘다
눈 오는 밤
김 익 택
어두운 밤
저 산 너머
바람으로 머물 수 없는 그곳에서
사박사박
달빛 머금은 소리는
그녀의 고운 발자국 소리
바람 한 점 없는
빈 하늘
그리움이 닿지 못하는 그곳에서
새록새록
별빛 머금은 소리는
그녀의 가여운 입김 소리
깊은 심연 속
마음의 파문이 멎은 그곳에서
사부작사부작
수줍음의 소리는
어느 여인의 옷고름 푸는 소리
눈 내리는
소리 멎고
기억마저 멈추는 그곳에서
질퍼덕 퍽퍽
이 한밤 정적을 깨뜨리는 소리는
어느 연인 깊은 사랑 익어가는 소리
이 밤 대지의
깊은 사랑은 끝없이 지속 되는데
외로운 나는
잡으려던 언어를 잃어버린 채
어두운 적막을 붙잡고 멍하니
밤 눈 내리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눈 그리움
김 익 택
사람들은
하늘의 선물이다
하늘의 꽃이라 부르지만
바람 불어도 향기 없고
피어서 져도 열매 없다
있다면
저 어디서 누가 찾아 올까
약속 없어도 기다려지는
어느 산골 소녀
그리움같이
가지에 쌓여 있다
후두둑 떨어지는
투박한 산짐승 도망가는 소리
그래도 맘에 두면
자꾸 쌓여 무거워져
마음을 조아리면
가슴에 남는 것은
홀로 앓아도 모르는
차가운 눈물 같은 그리움 뿐
눈은 하늘의 메신져
김 익 택
하얘서
너무 하얘서
고와서 너무 아름다워서
그 심장 느끼고 싶어
저도 몰래
한 움큼 말아 쥐었는데
남는 것은
손을 뚫을 것 같은 차가운
물기 뿐
미안해
네가 너무
순수하고 깨끗해서
욕심 없이 사심 없었는데
내가 나에게
양심을 묻는
욕심이 되고 말았구나
사랑도 행복도
쌓이면 짐이 된다는 사실
나눔 없는 욕심을 경계하는 진리
하늘의 메신져
그것 아니면 설명 할 길이 없다
눈은 눈물이에요
김 익 택
눈 내리는 날은 달이 보이지 않아요
눈 내리는 날은 달빛이 없어도 환해요
눈 내리는 날은 달빛이 아파서 쓰러져요
눈 내리는 날은 달빛 술에 취해서 비틀거려요
얼마나 아프고 아파서인지
온 세상이 싸늘해요
무릎에 닿으면 무릎이 시리고
어깨에 닿으면 어깨가 시려요
얼굴에 닿으면 금방 눈물이 되어 흐르네요
얼마나 슬프면 차가운 눈물이 될까요
세상 온 천지가 하얗게 쌓여도
그 속은 아파서 녹아요
그때 눈물은 아름답고 외롭고 맑아요
그대가 나무 가지에 쌓이고
돌담에 쌓이고 지붕에 쌓여
녹지 않으면 또
무거워서 모두가 아파해요
그대 쓰러지는 밤은 산과 대지는 포근해요
그대 가슴에는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못해요
새 발자국 가끔 있긴 하지만
사슴 발자국 가끔 있긴 하지만 금방 묻히고 말아요
바늘 꽃 같은 새 발자국
진 빵 같은 사슴 발자국
젖은 눈물 되고 말아요
눈
김 익 택
너는
무슨 숨길 것 많고
무슨 그리움이 많아
눈에 보이는 모든 것 하얗게 덮는가
겨울 바람에 대한 예의
김 익 택
무더운 여름 날
그렇게
밀어 올렸던 물마루가
붉게 타서
미쳐 인연을 다하기 전에
보라 바람이 가지 끝을 울릴 때
겨울 나무는
고개를 숙일 줄 안다
마디마다 시려오는
긴 시간을 견뎌낸다는 것이 결코
소홀치 않음을 안다
아무리 두 눈을 치켜 뜨고
주위를 살펴본들
서로 제 살을 서걱거리는 헐 벗은 이웃들
저 소나무 더욱 짓 푸르고 가지를 움츠리는 것은
겨울에 대한 예의다
그나마 몸을 떨게 하는
바람마저 없다면
어깨가 탈골 되고 팔이 찢어지고
하얗게 쌓이는 이미지는
뭉게구름 아니고 솜이불 아니지
달콤한 설탕 아니고 짠 소금 아니지
일용 할 양식 밀가루는 더욱 아니지
바쁘다고
엄동설한에 장미꽃을 피게 할 수는 없는 일
나무 가지 끝에서
늑대가 울고 귀신이 울고 산이 울고
동동 할미가 울고
기다림은 누구나
아쉬운 부채 같은 것
겨울을 견뎌낸다는 것은
한편의 예고편 영화처럼 짜릿한 전율 같은 것이지
바람 부는 마을
김 익 택
바람 부는 마을에
겨울이 오면
나무들은
남쪽을 향해 가지를 뻗고 등은 북쪽으로 휜다
바람이 모질 때마다
절규에 가까운 휘파람 소리 날카롭고
귀 전을 쌩쌩 달리는 귀신 소리 공기를 가른다
바람 부는 마을에
겨울이 오면
돌들은 더욱 뾰족하게 날을 세운다
무식하게 서 있는
언덕 빼기 바위만
차갑게 언 가슴 더 얼 것 없다며
제 가슴에 검게 핀 마른 버짐까지 모두 다 더러 내 놓는다
바람 부는 마을에
겨울이 오면
허리 굽은 노인은
부엌 아궁이에 연기 없는 갈비로 불을 지핀 뒤
아궁이 가득히 마른 장작 밀어 넣고
방으로 들어가서
빠꿈 담배 피우며 시선을 방문을 고정시킨 채
회를 치는 바람 소리를 멍하니 엿듣고 있다
그믐 밤
김 익 택
꽃도 지우고 나무도 지우고
땅도 지우고 바다도 지우고
하늘까지 까맣게 지우더니
남은 것은 소리밖에 없나이다
먹 같은 밤 소쩍새 소리 더 맑고
개구리 울음소리 사방천지 요란한데
풀 섶에서 목이 쉬도록 울어대는 소리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더이다
어둠만큼 엄밀한 것이 없고
어둠만큼 진실한 것이 없고
어둠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나이다
문지방에 머무는 염치없는 바람아
새신랑 새색시를 놀라게 하지 말거라
그믐 밤은 그냥 어둠이 아니리
어둠은 새 생명을 꿈꾸는 인큐베이터
새 아침은 씨앗을 맺는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