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림서원 독서루에서

 


김 익 택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성리학으로

인간사 삶과 죽음

올바르게 다스리고자 했던

대 학자 김종직과 

그의 제자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김일손(金馹孫)

유호인(兪好仁)

남효온(南孝溫)

조의제문으로  

죽임당했던 무오사화


그 올곧은 학문정신

살아서 반백년

죽어서 오백년 

아니 우리나라 

정치 역사에 

기리 남으리라 










































































예림서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 1567년(명종 22) 중동면 자시산에 덕성서원을 창건하고 김종직의 위패를 모셨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복원했다. 1634년(인조 12)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서원의 명칭을 예림서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박한주·신계성을 추가 배향했다. 1669년(현종 10)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875년에 복원되었다.



1567년(명종 22)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김종직(金宗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중동면 자씨산(慈氏山) 아래에 덕성서원(德城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에 복원하였다. 

1634년(인조 12) 지금의 밀양시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하였고, 서원 명칭을 예림서원으로 바꾸었으며, 박한주(朴漢柱)와 신계성(申季誠)을 추가 배향(配享)하였다. 이후 1680년(숙종 6) 지금의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다시 이건되어 보존되어 오고 있다.

1669년(현종 10)에 ‘예림’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毁撤)되었다가 1874년에 강당을 복구하고 예림재로 개편하였으며, 1921년 향중(鄕中: 

향원들의 동아리)유림이 사우(祠宇) 유지(遺址)에 설단(設壇)하고 향사(享祀: 제사)를 실시해왔다.

1962년에 서재를 건립하고 1971년 정부 보조로 강당을 중수 하였다. 1974년에 육덕사(育德祠)와 

정양문을 복원하고, 1975년 복원 고유(告由: 큰 일이 있을 때 사당 또는 종묘에 고하는 일)를 거행하였으며, 1985년부터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987년 완공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육덕사, 3칸의 강당, 각 3칸의 돈선재(敦善齋)와 직방재(直方齋), 2칸의 

전사청(典祀廳), 몽양재(蒙養齋)·독서루(讀書樓)·삼문(三門)·고사(庫舍) 등이 있다.

묘우(廟宇)인 육덕사에는 김종직을 주벽(主壁)으로 양쪽에 박한주와 신계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돈선재와 직방재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전사청은 향사(享祀: 제사) 때 제수(祭需)를 마련해 두는 곳이다.</P>

이 서원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매년 3월 상정(上丁: 첫 번째 丁日)과 

9월 상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 제사 음식)은 4변(籩) 4두(豆)이며, 재산은 전답 5,500평, 대지 500평 등이 

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서 영남학파의 종조이며, 그가 생전에 지은 조의제문이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죽음을 당하였다.

1431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부친 김숙자의 막내로 태어나 성리학에 밝았던 부친에게서 학문을 익히며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점필제는 문장과 경술(經術)에 뛰어나 이른바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조선초 성리학을 이룬 대학자로 평가되었다. 문하생으로는 정여창(鄭汝昌) ㆍ김굉필(金宏弼) ㆍ김일손(金馹孫) ㆍ유호인(兪好仁) ㆍ남효온(南孝溫) 등이 있다.

그가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1457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애도하는 글이었다.

김종직은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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