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산성
김 익 택
천년의 위엄을
하얀 이불이
포근하게 덮어주고 있다
쌓기 위해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 세월의 무게가
읽지 않아도 읽혀지는
역사가 되어서
수백만권의 책이 되어서
천년동안 꿈쩍 하지 않고
시간을 지키고 있다
눈 오는 밤 3
김 익 택
아 저 소리는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운 죄인의 발걸음
아 저 소리는
대문을 앞을
기웃거리는 도적의 발걸음
아 저 소리는
고운 우리 누님
님 찾아 떠나는 발걸음
아 저 소리는
새색시 친정 갈 때
치마자락 끄는 소리
아 저 소리는
어느 시인 고뇌의
시간 끝에 글을 쓰는 소리
아 저 소리는
지구가 인간에 묻는
삶의 지침의 올 곧은 소리
눈길 걸으며
김 익 택
아무도 가지 않는
눈길 혼자 걸으면
묵묵히 따라오는
발자국도 친구가 된다
가만히 돌아보면
삐뚤어서 그립고
서툴러서 정겨운 발자국은
나를 향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비 오고, 햇살 따사로우면
지난밤 개꿈같이 흔적 없지만
갈 때까지 따라가는 의리
아침 햇살의 그림자보다 더 의롭다
1억년이 넘는
시간의 공룡 발자국 같은
바위에 새긴 시간 아닐지라도
잠시나마 생의 흔적
이렇게 또렷한 적 없다
삶이 순간으로
끝날지라도
단 한번도 주인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오는 너는
영원히 저당잡힌 나의 삶의 굴레이다
*가야시대의 산성, 분산성 *
분산성은 고려 우왕 3년(1377년) 박 위 부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고종 8년(1871년) 정현석 부사가 개축한 것이다. 그러나 성의 기초 선정 방법이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소위 테뫼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때 최초 축성연대는 가야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산꼭대기에 있는 평탄한 지형을 둘러서 그 주위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을 이룬 성벽으로, 수직에 가까운 석벽은 높이가 약 3∼4m인데 무너진 부분이 적지 않다. 이 곳에 세워진 ‘정국군박공위축성사적비(靖國君朴公葳築城事蹟碑)’에 의하면, 이 산성은 조선 초기에 박위(朴葳)가 고산성(古山城)에 의거하여 수축한 뒤 임진왜란 때 무너진 것을, 1871년(고종 8) 다시 현재의 성벽으로 고쳤다고 한다. 성기(城基)의 선정법은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룬 테뫼식[鉢卷式]을 따른 점으로 미루어 그 시축(始築) 연대가 삼국시대임을 추측할 수 있다.
김해시내, 김해평야와 낙동강, 그리고 남해바다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분산의 정상부에 띠를 두르듯이 돌로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현재는 시내 쪽 경사면에 약 900m 가량의 성벽이 남아 있고, 성안에는 남북의 2개 문지와 서편의 암문, 우물지 등 몇 개의 건물터도 남아있다. 성곽의 길이는 총 929m, 평균 폭은 약 8m이다. 산성 안에는 해은사가 있다. 해은사는 가락국의 허왕후가 바다에서 왔던 것을 기리는 뜻에서 세워졌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곳에 승병이 주둔 하였다고 전한다.
* 분산성의 또다른 이름 만장대 *
김해시민들에게는 "만장대"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데, 만장대는 조선시대에 대원군이 왜적을 물리치는 전진기지로 '만길이나 되는 높은 대"라는 칭호를 내렸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1999년에 복원된 봉수대 뒷편의 바위에는 만장대라 쓴 대원군의 친필과 동장이 새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