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추억을 기억한다
김 익 택
홀로
밤 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여 보았느냐
둘이서
석양을 바라보며
애인을 손을 잡아 보았느냐
홀로
낙엽을 밟으며
옛 애인을 생각해 보았느냐
가을은
추억 하나
툭 하나 던져 주고 가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기억하는 것이다
가을 길목에서
김 익 택
계절을 쫓는
비바람 한바탕 몰아친 뒤
하늘이 맑아지면
눈치 빠른 제비는
남쪽 집 떠날 준비를 하고
한 여름 적막을 깨뜨리던 매미는
목젖이 헐었는가
지지직
전기 감전 소리 아프다
싸늘한 하늘 입김에
푸른 활엽수는
제 살기 위해 밀어 올리던 물을 줄이고
한 방울 물이 아쉬운
나뭇잎은
젖은 이슬을 먹으려고 몸부림치다
온몸 빨갛게 멍든 채 매달려 있다
나무 근심 덜어주려는 듯
북서풍이 와락
나뭇잎을 떨구면
온 천지는
노랑 빨강 감정 바람 나비들의 세상
그 바람에 몸을 실은
나뭇잎은 미련 버리지 못해
주춤주춤 하다 날아간다
가을은 누군가 그리운 계절
김 익 택
유리창에 이슬이 눈물같이
흘러내리면
거리는 온통 낙엽 엽서
한쪽 어깨가 시린 연인들은
이유도 없이 거리를 나와
노랗게 물든 가로수에게
여름을 묻는
빈손이 아름다운 계절이다
지난 여름 정염이 맺어 놓은 울음같이
발가벗은 차가운 바람에
시린 나머지
마지막 향기를 흩날리는 들국화처럼
죽음까지 다 주고 가는
아낌 없는 아름다운 계절이다
달빛 타고 날아 오는 기러기 떼
높고 푸른 그 너머 이야기같이
눈을 뜨고 눈을 감아도
그리운 사람같이 낡은 메모지에
유언 같은 시를 쓰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을 닮은 것들
김 익 택
가을은 닮은 것은 파란 하늘뿐만 아니다
황금 들판은 농부의 투박한 손끝 정성을 닮았고
붉은 산은 뜨거운 정열을 토해 내지 못한 여름은 아쉬운 바람을 닮았다
담장 위에 하얗게 핀 박꽃은 소박한 농심을 닮았고
장독대 위 광주리에 빨갛게 익어가는 고추는
속 타는 여심을 닮았다
풀 섶의 귀뚜라미는 한 여름 밤이 아쉬운 푸름을 닮았고
생명의 끝 자리에서 제 몸이 굳어가는 나비는 마른 잎을 닮았다
죽을 힘을 다해 풀 잎사귀를 기어 오르는
검은 사마귀는 저승사자를 닮았고
빈 들판을 지키는 허수아비는 마음이 허한 취한 사람을 닮았다
따뜻한 빛과 시원한 바람은
열심히 산 자의 땀방울을 씻어 줄 아는 너그러움을 닮는 계절이다
11월 길목에서 나를 생각하다
김 익 택
구렁이 담 너머 가듯
10월은 가고
지난 9월은
오늘도 어제 같은
하루를
순둥이 같은 보냈다
빈 하늘이
구름을 채우고 버리는 동안
나는 내 머리에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버렸을까
궁금 하지 않고
안타깝지 않는 하루가 모여
1주일이 되고 1개월이 지나
어느새 11월 문턱
먼 훗날 삶의 책임 소재
물을 길 없는
시간 다시 없을 때
소리 없는 늙음을 나는
어떻게 나를 추궁할까
가을은 그리고
김 익 택
가을은
할 일이 없어도 바쁜 날이고
바쁘게 살아도 아까운 날이다
가을은 또
울 일이 없어도 울고 싶고
울고 싶어도 웃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은 그리고
젊음이 수직 하강하는
갓 마흔 나이같이
성숙한 모든 것들은
하루 햇살에 여물고
하루 바람에 떨어지는 계절이다
가을 사랑은
미련을 남겨두고 가는 것이고
가을 이별은
시작
하루 사이에
가깝고도 먼 시간을
재촉하는 계절이다
바람의 훈시
김 익 택
가는 허리 붙잡고 살짝 흔들어도
허공을 떠 다니는
저 민들레 홀 씨는
바람이 중매쟁이이고 교통경찰이다
바람의 촉수가 살짝 등을 밀어도 허리를 굽히는
저 산마루 갈대는
백발 머리 휘날리며 내달리는 천년 묵은 여우이다
머리 풀고 사라지는 귀신처럼
굴뚝의 연기가
한바탕 바람에 요동치는 저녁
바싹 마른 잎들을 마당 귀퉁이에 모아 놓고
겨울 훈시를 하고 있다
제 의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부를 때 언제든지 떠 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바람의 명령 없이는 아름다운 비행은 없다는 것
서로서로 보듬는다는 것은
부서지고 깨어지고 서로에게 생체기 내는 일
위로는 될 수 없다는 것
버티고 서 있는 기둥 아니고는
씨앗까지 버려야 하고
푸르게 푸르게 우물에 멱을 감던 감나무는
까맣게 튼 맨 살 드러내야 하고
벌 나비 부르던 돌 담 밑 황국은
뿌리까지 다 내어주어야 한다
마지막 한줌 불 쏘시개가 되기까지
빈 마당에 쥐를 몰고 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