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治山書院 에서

 

김 익 택 

 

 


 

매미만 울어 대는

적막한 대낮 


정자 옆 목백일홍

열정처럼  

붉게 타고 있다


그를 기념하는

忠熱廟은 모두 비워 있고

공자 맹자 글을 읽던 觀雪當 모서리에는

왕거미가 진을 치고 있다


忠義 臣義

박재상 이야기와


기다림과 그리움

아내와 딸 망부석이야기 천년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를

아는 지 모르는 지

매미만 

치술렁 산자락을 울리고 있다

 










망해문에

 


김 익 택 

 

 

 

 

 

오늘 올까 내일 올까

치술령 고개에서

님 기다리던 세월

몇 십 년

마침내 돌로 굳어버린 아내

불변의 사랑

충신 박재상

천년 너머 지금까지

만고의 귀감이다




 




神母祠 뒷간에 흐르는 물

 

김 익 택 

 

 

 

 

태화강이 말라도

마르지 않는

神母祠 뒤간 돌담에

지질하게

새어 나오는 물

 

그 옛날

치술공주

남 몰래 훔치던 눈물인가 

소금보다 짜다


가랑비에

소매자락 적시듯

도랑을 적시다가

흘러도 모르는

담 벽 흙으로 스며들고 있다

 
















































치산서원(鵄山書院) 


정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있는 조선후기 에 건립된 박제상 관련 서원.시도기념물.


개설
서원의 기원은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처를 제사지내기 위해 신라시대 경주 묵장산(墨匠山)의 치술령(鵄述嶺)이라는 고개에 세워졌던 ‘신모사(神母祠)’에서 출발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5년(영조 21)에 영해박씨 주도로 신모사가 있던 두동면에 다시 건립하여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고 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년에 복원되었다. 치산서원지(鵄山書院址)를 포함하는 박제상유적(朴堤上遺蹟)이 1997년 10월 9일에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매년 3월 초 정일(丁日)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내용
박제상은 신라시대 충신이다. 신라 눌지왕이 왜에 인질로 잡혀간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기 위해 박제상을 왜에 파견하였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무사히 탈출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본인은 왜왕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다 끝내 참형을 당하였다. 이에 박제상의 처와 두 딸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경주의 묵장산 치술령이라는 고개에 올라 통곡하다 자진하니, 후인들이 그 절의를 사모하여 박제상의 처를 ‘치술령 신모(神母)’라 칭하고 신모사(神母祠)를 세워 제사지냈다고 한다. 후에 눌지왕은 박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증직(贈職)하고, 그의 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하였으며, 미사흔을 박제상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박제상은 치산서원 외에 경상북도 영덕의 운계서원에도 봉안되었다.

서원은 외삼문인 삼강문(三綱門), 박제상의 호를 따서 지은 강당인 관설당(觀雪堂), 동서재인 영휘재(永徽齋)와 경의재(景義齋), 그리고 박제상의 처 국대부인 금교김씨(金校金氏)의 사당인 신모사(神母祠), 박제상의 두 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의 영정을 모신 쌍정려(雙旌閭), 박제상의 사당인 충렬묘(忠烈廟)로 구성되어 있다. 신모사로 들어가는 문에는 ‘망해문(望海門)’, 쌍정려로 들어가는 문에는 ‘사효문(思孝門)’, 충렬묘로 들어가는 삼문에는 ‘성인문(成仁門)’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박재상 기본 정보

박제상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9세손이다.417년 임금이 된 눌지왕은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
혀 있던 두 동생을 몹시 보고싶어 했다. 삽량주 간으로 있던 바게상은 임금의 명을 받아 먼저 고
구려로 가서 복호 왕자를 구출해 냈다. 다시 왜로 건너가 미사흔 왕자를 구출해 귀국시켰으나 일
이 탄로나 자신은 붙잡혔다. 자신의 신하가 되면 부귀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왜왕이 설득
지만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의 개, 돼지가 될 지언정 왜왕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끝까지 신라
신하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왜왕은 심한 고문을 가해도 소용이 없자 박제상을 지금의 대마도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한편, 박제상의 부인은 딸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국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 죽었는데 그 몸
은 돌로 변해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은을암에 숨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이
박제상의 부인을 치술신모라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사당자리에
치산서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치산서원지와 망부석,은을암 이 3곳이 박제상 유적지로 울산광역시 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치술령 인근의 월평리 라는 곳이 박제상 부인의 집이 있던 곳이었고 박제상이 장가와서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박제상에게는 '아기','아영','아경' 세 딸과 '문량'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영해 
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둘째딸인 '아영'은 후에 외국에서 돌아온 미사흔 왕자와 결혼해 따님을 낳았고 이 따님은 자비왕
의 부인이 되었다.
박제상과 관련되 이 내용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전한다.

조선시대 영조때 세워진 치산서원은 대원군때 훼철 되었고 이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이 지역의
지들의 뜻을 모아 1991년 치산서원지에 지금의 건물을 신축하였다. 강학 공간인 관설당과 동재,
재, 제향공간인 충렬묘, 신모사 쌍정려가 있다.
음력 3월 초정일에 충렬공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딸에 대한 얼을 추모하고 충, 효, 얼의 정신
을 지역 주민들에게 계승 발전 시키기 위해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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